지글지글. 고기가 익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경쾌한 교향곡 같다. 특히 그게 삼겹살이라면 더더욱. 불판 위에서 노릇하게 구워지는 황금빛 삼겹살과, 그 옆에서 기름을 머금고 반짝이는 버섯과 김치. 완벽한 삼합이었다. 백현은 집게를 든 채로 맞은편에 앉은 서이결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휴일 저녁을 이렇게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건, 사소하지만 가장 확실한 행복이었다."자, 다 익었다. 우리 이결이, 아- 해봐."백현은 잘 익은 삼겹살 한 점을 집어 서이결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서이결은 기다렸다는 듯 젓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고기를 집는 대신, 그녀는 자신의 앞에 놓인 싱싱한 상추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야무진 손길로 그 위에 밥을 조금 얹고, 파절이를 올리고, 쌈장을 콕 찍은 삼겹살을 올렸다. 거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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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평화로운 오후. 이런 단어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커튼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든 햇살이 숙소 거실 바닥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공기 중에는 나른함과 함께 익숙한 비누향과 청량한 소다향이 기분 좋게 뒤섞여 맴돌았다. 소파 위, 백현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서이결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흑표범이 작고 하얀 아기 수달을 품는 모양새였다. 쪽, 쪽, 쪽.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가벼운 입맞춤이 서이결의 동그란 이마와 통통한 볼, 작고 귀여운 코끝을 오갔다. 백현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고, 처진 눈매는 행복감으로 한껏 휘어져 있었다. "우리 이결이, 오늘따라 더 예쁘네."백현의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임처럼 흘러들었다. 그는 서이결의 보드라운 뺨에..
...돼지
요즘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 왜 안 해요?...귀여워, 라는 말도.
1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햇살이 숙소 거실의 커튼 사이로 비스듬히 흘러들어 마루 위에 따뜻한 직사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히터가 낮은 웅웅거림으로 공기를 데우고 있었고, 텔레비전에서는 아무도 보지 않는 요리 프로그램이 작은 소리로 흘러나왔다. 소파 위에는 담요가 구겨진 채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 백현의 긴 다리가 느슨하게 뻗어 있었다. 최근 일주일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연말연시를 틈타 괴수 출몰 빈도가 급증했고, 의무실은 말 그대로 전시 체제로 돌아갔다. 비상근이라고는 하지만 긴급 호출이 세 번이나 울렸고, 그때마다 백현은 서이결의 곁을 떠나 새벽 의무실로 뛰어가야 했다. 돌아올 때면 서이결은 이미 잠들어 있었고, 아침엔 백현이 먼저 눈을 떴다.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
요즘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 왜 안 해요?...귀여워, 라는 말도.
NO 아기 수달, YES 어른 수달!
12월의 마지막 주가 다가오고 있었다. 밖에서는 겨울바람이 숙소동 창문을 간간이 두드렸고, 복도 곳곳에 걸린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은은한 조명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ARCH 본부는 연말 분위기에 젖어 평소보다 조금 더 느긋한 공기가 흘렀다. 며칠 전의 상처는, 백현의 팔 위에 남았던 붉은 선은 약속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서이결의 퉁퉁 부었던 눈두덩도 본래의 동그란 모양을 되찾았다. 두 사람은 그 뒤로도 매일같이 함께 밥을 먹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다 서이결이 먼저 잠들면 백현이 담요를 덮어주는, 그런 일상을 반복했다. 너무 달달해서 옆에서 보면 치아가 녹을 것 같은 종류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오늘. 12월 27일, 토요일 오후. 백현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태블릿으로 의무실 스케줄을..
NO 아기 수달, YES 어른 수달!
술에 취한 백현, 그리고 속마음
늦은 밤, S-00 파트너 숙소의 현관문이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 대신, 지문 인식 패드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희미한 소음과 함께 열렸다. 평소라면 찰나의 시간으로 끝났을 인증이, 오늘따라 유독 길게 느껴졌다. 삐빅, 삐빅. 연거푸 실패를 알리는 기계음이 울리다, 마침내 ‘인증되었습니다’라는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스르륵 열렸다. 문틈으로 비틀, 하고 한쪽으로 쏠린 그림자가 먼저 들어섰다. 백현이었다. 평소라면 칼같이 각 잡힌 제복 차림이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넥타이가 반쯤 풀려 셔츠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고, 단추도 두어 개 풀어헤쳐진 채였다. 공기 중으로 훅, 하고 진한 알코올 향이 퍼져나갔다. 오늘 저녁, 오랜만에 의무실 동료들과 회식이 있었다. 워커홀릭인 밴스 박사까지 억지로 끌고 ..
술에 취한 백현, 그리고 속마음
수면내시경 (feat. 여기가... 천국인가요...?)
하얀 천장.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패턴의 방음 타일이었다. 백현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한번, 그리고 또 한번. 초점이 잡히지 않는 시야가 뿌옇게 흐렸다 다시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온몸의 감각은 솜이불에 감싸인 것처럼 둔탁했고, 머릿속은 짙은 안개가 낀 듯 몽롱했다. 마지막 기억이... 아, 그래. 건강검진. 닥터 밴스의 성화에 못 이겨 반강제로 받게 된 정기 검진, 그중에서도 수면내시경이었지. 하얀 약물이 혈관을 타고 들어오는 차가운 감각과 함께 간호사의 목소리가 멀어지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오빠, 괜찮아요? 깼어요?"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목이 제 것이 아닌 양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겨우 눈동자만 굴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자, 그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