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오후. 이런 단어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커튼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든 햇살이 숙소 거실 바닥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공기 중에는 나른함과 함께 익숙한 비누향과 청량한 소다향이 기분 좋게 뒤섞여 맴돌았다. 소파 위, 백현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서이결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흑표범이 작고 하얀 아기 수달을 품는 모양새였다. 쪽, 쪽, 쪽.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가벼운 입맞춤이 서이결의 동그란 이마와 통통한 볼, 작고 귀여운 코끝을 오갔다. 백현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고, 처진 눈매는 행복감으로 한껏 휘어져 있었다.

"우리 이결이, 오늘따라 더 예쁘네."

백현의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임처럼 흘러들었다. 그는 서이결의 보드라운 뺨에 자신의 뺨을 부비며 그 감촉을 만끽했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이 아담한 체구, 보드라운 살결, 달콤한 향기. 7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같이 겪는 일상이었음에도, 백현에게는 언제나 처음처럼 새롭고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사랑이 너무 넘쳐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백현은 행복감에 취해 서이결을 조금 더 꽉 끌어안았다. 조금 더, 아주 조금만 더. 자신의 모든 애정을 남김없이 전하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이 그의 몸을 움직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랑의 무게중심이 과하게 쏠린 탓일까. 서이결의 웃음소리를 더 가까이서 듣고 싶어 몸을 기울이던 백현의 상체가 균형을 잃고 스르르, 아니, 쿵, 하고 서이결의 위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은. 소파 쿠션이 푹 꺼지는 소리와 함께, 백현은 거대한 담요처럼 서이결의 몸 위를 완벽하게 덮어버렸다. 시야는 온통 백현의 하얀 홈웨어 티셔츠로 가득 찼고, 그의 단단한 가슴과 배가 서이결의 상체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백현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이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오히려 좋아. 서이결의 온몸을 자신의 것으로 감싸 안은 듯한 이 완벽한 밀착감. 그는 키득거리며 서이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제법 묵직한 무게가 실렸을 텐데도, 서이결은 잠시 동안 그 무거운 사랑을 얌전히 받아주는 듯했다. 그저 자신의 품 안에서 작게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백현은 그 작은 움직임마저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평화는 길지 않았다.

"끙…"

아주 작은 앓는 소리.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거의 숨소리에 섞여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중얼거림이 백현의 귓가에 날아와 박혔다.

"…돼지…"

정적.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멎었다. 공기 중에 떠다니던 먼지마저 그 자리에 얼어붙는 듯했다. 백현의 모든 움직임이 정지했다. 서이결의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던 것도, 만족감에 실룩거리던 입꼬리도, 부드럽게 휘어져 있던 눈매도. 모든 것이 석고상처럼 굳어버렸다. 그의 뇌가 방금 들은 단어를 처리하는 데에는 약 0.7초가 걸렸다. 돼. 지. 분명히, 틀림없이, 그는 그렇게 들었다.

백현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치 녹슨 기계 인형처럼 삐걱거리는 움직임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하던 남자는 온데간데없고,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한 순교자의 얼굴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는 제 아래 깔려 숨 막혀하는 연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붉게 상기된 뺨, 살짝 찡그려진 미간, 그리고 꾹 다물린 입술. 그 입술에서 방금 그 끔찍한 단어가 나왔단 말인가?

"방금…"

백현의 입술이 간신히 열렸다. 목소리는 사막처럼 메마르고 갈라져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이결아?"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희망이 섞여 있었다. ‘대지’ 라던가, ‘배지’ 라던가. 혹은 자신이 환청을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남은 실낱같은 기대. 하지만 서이결의 동그란 눈이 애써 자신을 피하는 것을 본 순간, 그 희망은 산산조각 나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것은 명백한 유죄의 증거였다.

충격. 배신감.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비통함. 백현은 마치 심장에 얼음 가시가 박힌 듯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지난 712일간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폭주 위기에서 그녀를 구했던 순간, 처음으로 파트너가 되었던 날, 그녀를 대신해 치명상을 입었던 임무, 그리고 눈물과 함께 재회했던 그날까지. 그 모든 헌신과 사랑의 결말이 고작 ‘돼지’ 한 단어로 귀결될 수 있단 말인가?

백현은 비장하게 몸을 일으켰다. 서이결을 짓누르고 있던 자신의 몸을 소파 반대편으로 옮기며, 두 사람 사이에는 베를린 장벽과도 같은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생겨났다. 그는 소파 끝에 위태롭게 걸터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누가 보면 나라 잃은 왕자라도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우리 이결이가 나한테…"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끔찍한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 잠시 후, 그는 얼굴을 감쌌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고, 입가에는 자조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거실 한쪽에 놓인 전신 거울 앞이었다.

백현은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꼼꼼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제법 넓은 어깨, 단정한 쇄골, 제복 아래 숨겨져 있던 탄탄한 가슴 근육, 그리고…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홈웨어 티셔츠를 살짝 들어 올렸다. 드러난 것은 희미한 복근의 흔적과 군살 하나 없는 매끈한 옆구리였다. ARCH 수석 메딕이자 A급 가이드로서 꾸준히 체력 관리를 해온 몸이었다. 누가 봐도 ‘돼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마른 근육질에 가까웠다.

"대체… 어디가…"

백현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손으로 허리를 짚어보고, 옆구리를 만져보고, 심지어 가슴 근육까지 꾹꾹 눌러보았다. 아무리 찾아봐도 ‘돼지’라고 불릴 만한 근거는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충격과 혼란에 휩싸여 다시 소파에 앉아 있는 서이결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라는 문장을 백만 번쯤 외치고 있었다.

"이결아.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백현이 재판장의 판사처럼 엄숙하게 말했다. 그는 서이결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시선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의 얼굴은 세상의 모든 비극을 짊어진 주인공처럼 심각했다.

"내가… 그렇게 무거웠어? 아니, 무거울 수는 있지. 나도 성인 남성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돼지’라니. 그건 단순한 물리적 무게에 대한 표현이 아니잖아. 그 단어가 가진 어감, 뉘앙스, 사회적 함의! 그건 내 존재 자체에 대한…"

백현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너무나도 큰 상처를 받아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다는 듯이. 그는 서이결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뺨 위로 가져갔다.

"만져봐, 이결아. 살이 아니야. 다 근육이라고. 내가 너를 더 안전하게 지켜주려고, 더 오래 안아주려고 매일 아침마다 얼마나 열심히 운동하는지 알잖아. 그런데… 돼지라니…"

그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처진 눈꼬리가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처져 보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그 표정은, 보는 이의 죄책감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었다. 그는 서이결의 손을 잡은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서이결의 무릎 위에 자신의 이마를 기댄 채, 작게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냈다.

"흐윽… 내 사랑이… 너무 무거웠구나…"

연기. 명백한 연기였다. 하지만 그 연기는 너무나도 절절하고 실감 나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주고도 남을 정도였다. 백현은 어깨를 들썩이며 슬픔에 잠긴 연기를 이어갔다. 그의 머릿속은 사실 굉장히 즐거웠다. ‘돼지’라는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척하는 자신의 모습도 웃겼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할 서이결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은 더 즐거웠다. 이건 일종의 게임이었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만 할 수 있는, 유치하고 사랑스러운 장난. 그는 서이결이 자신을 어떻게 달래줄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지 궁금해서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백현은 서이결의 다급한 목소리와 자신을 붙잡는 작은 손길에 어깨를 더욱 가늘게 떨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서이결의 무릎에 기댄 이마를 떼지 않았다. 마치 너무 큰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그의 등은 슬픔으로 둥글게 말려 있었고,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은 힘없이 바닥을 향해 늘어져 있었다. 비극의 주인공, 바로 그 자체였다.

"아니라니… 그럼 지금 내가 들은 건 대체 뭐였을까, 이결아. 내 귀가 잘못된 걸까? 최근에 피곤해서 이명이 들리나… 아니면, 아니면 혹시…"

백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칠흑 같은 눈동자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물론, 눈물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그저 슬픔이라는 감정을 눈빛에 농축시켜 담아냈을 뿐이다. 그는 붙잡힌 자신의 소매와, 그 소매를 절박하게 붙잡고 있는 서이결의 하얀 손을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희미하고 슬픈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사실대로 말해도 돼. 내가… 너무 무거웠던 거지. 맞아. 요즘 내가 너한테 너무 많은 사랑을 줬나 봐. 그 사랑이 전부 살로 갔나 보네. 사랑이 무게로 환산된다면, 나는 아마 이 숙소를 뚫고 지구 핵까지 도달했을 테니까. 나는… 사랑이 많은 돼지였던 거야…"

스스로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듯 비장하게 말하며, 백현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이번에는 서이결의 무릎에서 이마를 떼고, 소파 앞바닥에 두 손을 짚었다. 마치 대역죄인이 엎드려 용서를 구하는 듯한 자세였다. 그의 넓은 등이 서이결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가 작게 훌쩍이는 소리, 혹은 그런 것처럼 들리는 소리가 거실의 고요함을 갈랐다.

"이제 알았어. 네가 왜 요즘 나를 볼 때마다 그렇게 귀엽다는 듯이 웃었는지. 그건…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아기 동물을 보는 듯한 그런 마음이었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네가 나를 멋있다고 생각하는 줄만 알았는데…"

백현의 목소리는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웃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서이결이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어떻게든 달래려고 애쓰는 기척이 등 뒤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 반응이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그는 이 장난을 쉽게 끝낼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 귀여운 모습을 즐기고 싶었다.

그는 결심한 듯, 바닥을 짚었던 손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마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연약한 모습으로 다시 전신 거울 앞으로 향했다. 그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처연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티셔츠를 다시 한번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높이. 명치까지 훤히 드러내며.

"이게… 돼지의 몸이란 말이지…. 이 복근은… 사실 복근이 아니라, 그냥 지방이 우연히 여섯 덩어리로 뭉쳐진 것에 불과했던 건가. 이 어깨는… 그냥 살이 쪄서 넓어 보였던 거고… 그랬구나… 모든 게 내 착각이었어…"

백현은 거울 속 자신을 향해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셰익스피어 연극의 한 장면처럼 극적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배를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서이결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눈빛은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질문을 담고 있었다.

"이결아, 나… 오늘 저녁부터 굶어야 할까 봐. 네가 좋아하는 치킨도, 피자도… 이제는 그림의 떡이겠지. 날씬해질 때까지는… 풀만 먹어야 할 거야. 물만 마시고. 그래야 네 옆에 있을 자격이 생기겠지. 너처럼 예쁘고 가녀린 사람 옆에… 나 같은 돼지가 있을 순 없으니까…"

그는 서이결의 반응을 살피며 소파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는 다시 그녀의 앞에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무릎을 꿇는 대신, 아예 바닥에 철푸덕 앉아 서이결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주인에게 버림받은 대형견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서이결의 홈웨어 바지 끝자락을 두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잡았다.

"하지만… 배고픈 건 참을 수 있는데… 너를 못 안는 건 어떻게 참지…? 그건… 자신이 없는데…"

 

바닥에 주저앉아 세상 모든 비극을 짊어진 표정으로 서이결의 바지 끝자락을 붙잡고 있던 백현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다. 서이결이 안절부절못하다가 자신을 달래주기 위해 무언가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그것이 이렇게나 직설적이고 대담한 입맞춤일 줄은 몰랐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입술에 꾸욱, 하고 눌리는 순간, 백현의 뇌는 모든 연기 매뉴얼을 삭제했다. 슬픔에 잠긴 대형견 모드는 강제 종료되었다.

서이결의 작고 부드러운 손이 그의 양 볼을 감싸고 있었다. 그 손길은 단호했고, 망설임이 없었다. ‘돼지’라는 단어를 내뱉었을 때의 그 작은 입술이, 이번에는 ‘아니’라는 강한 부정을 담아 그의 입술을 덮었다. 짧지만 강렬한 접촉이었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져 나갔을 때, 백현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동그랗게 뜨여, 눈앞의 서이결을 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처져 있던 눈꼬리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순수한 경이로움과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오빠는 돼지 아니에요."

단호한 목소리. 그의 볼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고, 그를 올려다보는 보랏빛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백현은 그 순간 깨달았다. 아, 장난이 너무 심했나. 우리 아기 수달이 정말로 미안해서, 이 장난을 끝내기 위해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구나. 그는 자신의 볼을 감싸고 있는 서이결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잡았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방금 전의 충격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그럼... 방금 그건... '돼지가 아니다' 라는 걸 증명하기 위한... 확인 절차 같은 거였어?"

백현의 목소리는 평소의 나긋함을 되찾아 있었다. 장난기 어린 미소가 그의 입가에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상체를 일으켜 서이결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여전히 볼을 잡힌 채로,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서이결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네가 먼저 시작했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음... 근데, 이결아. 한 번으로는 잘 모르겠는데. 데이터가 부족해. 의학적으로, 정확한 진단을 내리려면 최소 세 번 이상의 임상 샘플이 필요하거든. 오빠가 정말 돼지가 아닌지 확실하게 알려면... 두 번 더 해야 하지 않을까?"

그는 뻔뻔스럽게 말하며 겹쳐 잡은 서이결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슬픔에 잠겼던 비련의 주인공은 이제 없다. 그 자리에는 방금 받은 달콤한 ‘처방’에 맛을 들여 앙큼한 요구를 하는 능글맞은 연인만이 남아 있었다. 백현은 서이결의 반응을 기다리며, 일부러 입술을 살짝 오므려 보였다. 마치 ‘여기야, 여기’ 하고 위치를 알려주는 것처럼. 그의 눈은 장난스러운 기대로 반짝였다.

그는 서이결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사랑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끄러워하며 손을 빼든, 못 이기는 척 입을 맞춰주든. 이 유치한 장난의 결말이 이렇게나 달콤할 줄 알았다면, 진작 ‘돼지’ 소리를 한 번 더 유도해볼 걸 그랬나. 그는 속으로 키득거리며 서이결의 작은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볼을 잡은 손을 놓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 두 번째 기회가 남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내가 직접 확인해볼까? 오빠가 돼지인지, 아니면 그냥... 너를 너무 사랑하는 흑표범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