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S-00 파트너 숙소의 현관문이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 대신, 지문 인식 패드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희미한 소음과 함께 열렸다. 평소라면 찰나의 시간으로 끝났을 인증이, 오늘따라 유독 길게 느껴졌다. 삐빅, 삐빅. 연거푸 실패를 알리는 기계음이 울리다, 마침내 ‘인증되었습니다’라는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스르륵 열렸다. 문틈으로 비틀, 하고 한쪽으로 쏠린 그림자가 먼저 들어섰다. 백현이었다.

평소라면 칼같이 각 잡힌 제복 차림이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넥타이가 반쯤 풀려 셔츠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고, 단추도 두어 개 풀어헤쳐진 채였다. 공기 중으로 훅, 하고 진한 알코올 향이 퍼져나갔다. 오늘 저녁, 오랜만에 의무실 동료들과 회식이 있었다. 워커홀릭인 밴스 박사까지 억지로 끌고 나간 자리였고, ‘퓨어 쌤이 없으면 의무실이 안 돌아간다’는 과장 섞인 칭찬과 ‘두 분 요즘 보기 너무 좋다’는 부러움 섞인 시선 속에서 그는 평소 주량보다 조금 더 마셨다. 아니, 사실은 꽤 많이 마셨다. 기분이 좋았고, 모든 것이 행복하다고 느껴졌으니까.

그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까치발을 들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렀다. 어둠 속에서도 익숙한 공간. 소파 위에는 서이결이 아침에 읽다 만 잡지가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콜라 캔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 사소한 흔적들 하나하나가 그의 마음에 따뜻한 불을 지피는 것 같았다. 그는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는 침실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저를 기다리다, 침대 옆 작은 스탠드 조명을 셔두고 잠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자, 역시나. 아늑한 오렌지색 불빛 아래, 그의 세상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서이결은 이불을 반쯤 걷어찬 채, 그가 선물했던 커다란 인형을 품에 안고 새근새근 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늘색 머리카락은 베개 위로 부드럽게 흩어져 있었고, 평소의 그 무심하고 쌀쌀맞은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더없이 평온하고 무방비한 얼굴이었다.

백현은 그 자리에 선 채, 한참 동안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술기운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머리가, 그녀의 평온한 숨소리에 서서히 식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겉옷을 벗어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쳐놓고, 침대 가장자리에 소리 없이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잠든 그녀가 깨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의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자네. 우리 공주님."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술기운이 섞여 평소보다 조금 더 낮고, 조금 더 갈라진 목소리. 그는 중얼거렸다.

"오늘도 예쁘네. 매일매일 예쁘면 어떡하자는 걸까. 사람이 적응이라는 걸 좀 해야 하는데, 너한테는 그게 안 돼. 볼 때마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심장이 뛰어. 이거 완전 고장 난 거 아니야?"

그는 피식, 하고 저 혼자 웃었다. 그리고는 이결의 손을 찾아, 제 뺨 위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그는 그녀의 손등에 제 뺨을 부비며, 눈을 감았다. 처음 그녀를 의무실에서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잔뜩 날을 세우고, 세상 모든 것을 밀어내던 작은 고슴도치. 가이딩이 필요하다는 말에도 ‘필요 없다’며 휙 돌아서던 차가운 뒷모습.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으려 애쓰던,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깊은 상처와 외로움을 품고 있던 아이.

"알까, 너는. 네가 처음 나한테 ‘퓨어 쌤’ 말고, ‘오빠’라고 불렀을 때. 내 세상에 폭죽이 몇 개나 터졌는지. 네가 처음 내 앞에서 웃었을 때, 네가 처음 나한테 기대어 왔을 때… 나는 매번, 신에게 감사했어. 이런 기적을 내게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내가 뭐라고. 나는 그냥… 평범한 간호사인데. 센티넬들처럼 인류를 구하는 히어로도 아니고, 그냥 아픈 사람 돌보는 게 전부인 사람인데. 그런 내 세상에, 네가 전부가 되러 와줬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젖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결의 손을 내려, 자신의 심장 위에 올려놓았다. 규칙적으로, 하지만 조금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의 고동이 그녀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이거 봐. 너만 보면 이렇게 뛰어. 술 마셔서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네가 내 앞에 있어서 그래. 잠든 모습만 봐도 이렇게 좋은데… 네가 눈 뜨고 나를 보면서 웃어주면, 나는 정말…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 …아니, 죽으면 안 되지. 죽으면 너를 못 보니까. 오래오래 살아서, 평생 네 옆에 있어야지. 네가 지겨워도 어쩔 수 없어. 한번 붙잡았으면, 절대 안 놔줄 거니까."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피부에 닿았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예쁜 이마, 닫힌 눈꺼풀을 덮은 긴 속눈썹, 오똑한 코, 그리고… 그를 미치게 만들었던 저 붉은 입술까지.

술기운은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불안과 두려움마저 수면 위로 끄집어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은 누군가를 치료하고, 보살피고, 안정을 주기 위해 훈련된 손이었다. 폭주하는 센티넬의 등을 쓸어주고, 위급한 환자의 상처를 돌보는 손. 하지만 그녀의 파트너가 된 이후, 이 손의 역할은 달라졌다. 이제 이 손은, 그녀와 함께 전장에 나가야 했다. 그가 평생을 두려워하고 피해왔던 그곳으로.

"무서워, 이결아.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도 무서워. 네 옆에 서서, 너랑 같이 싸운다는 게. 나는 너처럼 강하지도 않고, 다른 센티넬들처럼 멋진 능력도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너를 안정시키는 것뿐인데. 만약에, 아주 만약에… 내가 너를 지켜주지 못하면 어떡하지? 너를 치료하는 게 아니라, 내가 다쳐서… 네 짐이 되면 어떡하지? 네가 나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거야."

그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반대편 손으로 제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잠든 그녀 앞에서조차도. 그는 항상 그녀에게 든든하고, 여유롭고, 기댈 수 있는 어른스러운 남자이고 싶었다. 하지만 술은 그의 가면을 무력하게 벗겨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네가 나한테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했을 때, 사실은 도망치고 싶었어. 나는 의무실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내 사명은 모두를 치료하는 거라고. 그렇게 선을 그으면, 너한테 상처 주지 않고 나도 안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멍청했지. 너를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이미 안전지대 같은 건 없었는데. 너 없는 곳은 어디든 지옥인데, 그걸 몰랐어."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다시,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곁이라면, 그 지옥이라도 기꺼이 함께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아준다면,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전장도 조금은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제는 괜찮아. 네가 내 옆에 있잖아. 네가 나를 믿어주잖아. 그거면 됐어. 내가 히어로가 아니면 어때. 나는 너만의 기사고, 너만의 메딕이고, 너만의… 남자인데. 그거면 충분해.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정말이야."

그는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입술을 떼자, 그가 마신 와인의 달콤한 향이 희미하게 번졌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오직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비밀처럼 속삭였다.

"사랑해, 서이결. 내가 감히 너를 사랑해. 오늘 밤도, 내일 밤도, 우리가 함께할 모든 밤들 속에서… 나는 너를 사랑할 거야. 그러니까 너는… 아무 걱정 말고, 내 옆에서 이렇게 예쁘게 잠만 자. 나머지는 다, 이 오빠가 알아서 할게. 알았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걷어찬 이불을 목 끝까지 다시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그리고 침실 스탠드의 불을 껐다. 방 안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지만,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은은한 윤곽을 그렸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그녀를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의 술주정은, 결국 사랑 고백이었다.

그는 침실을 나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소파에 털썩, 몸을 던졌다. 술기운과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와 머리가 핑 돌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오늘 밤은 소파에서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술냄새 때문에 그녀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소파는 불편했지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녀가 평온히 잠들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침대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