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오후였다. ARCH 본부, 아이기스를 감싼 인공 하늘은 계절에 맞춰 쾌청한 가을의 색을 띠고 있었고, 그 빛은 S-00 파트너 전용 숙소의 넓은 거실 창을 통해 부드럽게 쏟아져 들어왔다. 소파 위, 백현은 등을 푹신한 쿠션에 기댄 채 한 손으로는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제 품에 기댄 서이결의 하늘색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쓸어 넘기고 있었다. 열린 책 페이지는 한참 전에 멈춰 있었지만, 그는 굳이 다음 장으로 넘기려 하지 않았다. 그저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조용히 숨을 내쉬는 연인의 온기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부드러운 머리칼의 감촉, 공기 중에 옅게 퍼지는 그녀의 시원한 소다향을 온전히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그녀의 숨소리 사이로, 문득 나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늘 그렇듯 조금은 무심한 듯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맑은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는, 오직 백현만이 알아챌 수 있는 그런 톤이었다.
"오빠."
백현은 대답 대신,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길에 조금 더 다정한 마음을 담아 그녀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러자 서이결이 조금 더 깊이 파고들며 물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과 어떤 사람이 우연히 만나서, 우연히 사랑에 빠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철학적이고, 낭만적이며, 동시에 뜬구름 잡는 소리 같기도 한. 백현은 잠시 눈을 깜빡이며 질문의 의도를 가늠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조용히 덮어 옆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제 품에 안긴 작은 몸을 좀 더 편안하게 고쳐 안았다. 그리고는 천장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음… 글쎄. 우연히 만나서, 우연히 사랑에 빠질 확률이라. 그거 완전 로또 당첨보다 더 어려운 거 아닐까?"
그는 빙그레 웃으며 서이결의 보랏빛 눈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다음 말을 기다리며 반짝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생각해봐. 이 넓은 세상에 사람이 몇 명인데.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필이면 딱 한 사람을, 그것도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니라 서로를 알아보고, 심지어 마음까지 통할 확률이잖아. 아마… 벼락을 한 두세 번쯤 연달아 맞고도 멀쩡히 살아남을 확률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거의 0에 수렴하는 기적 같은 거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코끝에 제 코끝을 장난스럽게 비볐다. 기적. 그 단어의 무게가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달콤하게 채웠다.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그 기적이라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는 알고 있었다. 뻔한 대답일 수도 있었지만, 그의 다정한 목소리로 듣는 그 말은 서이결에게 충분한 만족감을 주는 듯했다. 그녀는 잠시 그의 대답을 음미하듯 조용히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오빠."
이번에는 조금 더 낮은, 조금 더 진지한 목소리였다.
"우리가 다시 만날 확률은요? 만약에… 우리가 여기서 헤어지고, 서로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그렇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다가, 길 위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칠 확률은 얼마나 돼요?"
순간, 백현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싹 가셨다. 다시 만날 확률.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채로. 그 가정은 너무나도 구체적이어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서늘함을 동반했다. 한때 그들은 정말로 헤어졌었고, 서로를 향한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 끔찍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질문에,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마치 지금 눈앞의 그녀를 놓치면 정말로 모든 게 사라져 버릴 것처럼.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창밖의 햇살이 그녀의 뺨 위에서 부서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하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100퍼센트."
단호한 대답에, 서이결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진지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만약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서 우리가 서로를 잊는다고 해도, 나는 무조건 너를 다시 찾아낼 거야. 아니, 우리는 어떻게든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는 서이결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엄지손가락으로 눈가를 천천히 쓸었다.
"기억을 잃어도 소용없어. 내 심장이, 내 영혼이 너를 기억할 테니까. 길을 걷다가 우연히 네가 풍기는 소다향을 맡으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할 거고. 어딘가에서 너랑 닮은 보랏빛을 보면, 하루 종일 그 색깔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거고. 그러다 보면 결국,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너한테 향하게 되겠지. 그건 확률의 문제가 아니야, 이결아."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녀의 눈동자에 오롯이 담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장 깊은 곳의 진심을 꺼내 보였다.
"그건… 거스를 수 없는 본능 같은 거야. 내가 너의 가이드인 것처럼, 네가 나의 센티넬인 것처럼. 세상 모든 게 변하고 모든 기억이 사라져도, 백현이라는 존재가 서이결이라는 존재에게 끌리는 이 사실 하나만큼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 그러니까 확률은, 무조건 100퍼센트. 우리는 다시 만나서,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될 거야. 몇 번을 반복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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