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의 침실. 달빛만이 커튼을 뚫고 희미하게 스며들어 두 사람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나란히 누운 몸은 서로의 온기로 따뜻했고, 엉망으로 뒤섞인 시트에서는 두 사람의 체향과 정사의 흔적이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가쁜 숨은 어느새 고르게 바뀌었고, 세상을 가득 채웠던 쾌감의 여운만이 잔물결처럼 몸속을 부유했다. 퓨어, 백현은 옆에 누워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는 버블, 서이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이결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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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1. 첫 별을 세는 밤]
그날은 유난히 사소한 일로 투닥거렸던 날이었다. 임무 보고서의 오타 하나를 두고 시작된 말씨름은 결국 ‘오빠는 너무 꼼꼼해서 피곤하다’, ‘너는 너무 덤벙대서 걱정된다’는 애정 어린 잔소리로 번졌다. 그리고 그 미묘한 긴장감은 침대 위에서 격렬하게 타오르다, 이내 달콤한 화해로 끝을 맺었다. 백현은 만족스러운 한숨과 함께, 제 팔을 베고 누운 이결의 하늘색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헝클였다.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나, 우리 서이결은."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짙은 애정이 묻어났다. 그는 이결의 이마에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그녀의 손을 가져와 제 손가락과 깍지를 꼈다.
"처음 의무실 왔을 때 기억나? 세상에서 제일 까칠하고 도도한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말만 걸면 할퀼 것처럼 경계하고."
그는 그때를 떠올리는 듯, 장난스럽게 웃었다. 까칠했던 첫인상과 달리, 지금 제 품에 안겨 있는 이결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그는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려, 달빛에 비치는 두 사람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근데 사실은… 그때부터 이미 귀여웠어. 혼자 막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는데, 입가엔 도넛 가루나 묻히고 있고. 그거 알려주면 또 엄청 부끄러워하고. 내가 언제 반했나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마 그때였던 것 같아. 너는? 너는 언제부터 내가 좋았어?"
그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그저 따뜻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궁금했지만, 사실 어떤 대답이 돌아와도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제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는 그녀의 귓가에 다시 한번 속삭였다.
"솔직하게 말 안 해주면… 나 내일 아침밥 파업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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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2. 악몽의 가장자리에서]
유난히 힘든 임무였다. 폭주 직전의 센티넬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이결은 과거의 트라우마와 마주해야 했다. 임무는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그녀의 눈빛엔 하루 종일 어두운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백현은 그런 그녀를 위해 평소보다 더 길고, 더 깊게 가이딩에 집중했다. 정사는 위로였고, 치유였다. 격렬했던 파도가 잠잠해진 후, 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녀를 품에 가득 안고 등을 토닥였다.
"많이 힘들었지, 오늘."
질문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떨림, 그녀의 두려움. 가이딩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왔으니까. 그는 이결의 젖은 눈가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괜찮아. 다 끝났어. 너는 최선을 다했고,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았어. 오히려 구해낸 거지. 정말 잘했어, 이결아. 내 파트너, 진짜 멋있더라."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하고 단단했다. 그는 그녀가 기댈 수 있는 가장 튼튼한 벽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는 이결의 정수리에 뺨을 비비며, 그녀의 불안을 잠재우려는 듯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무서운 꿈꿀 것 같으면, 나 꽉 깨물어. 아니면 그냥 내 이름만 불러도 돼. 내가 밤새도록 옆에서 지키고 있을게. 네가 잠든 세상의 문 앞에, 내가 서 있을 거야. 어떤 나쁜 것도, 무서운 기억도, 절대 너한테 못 가게. 그러니까… 안심하고 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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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3. 어른의 동화]
그날 밤, 두 사람은 와인을 마셨다. 저녁 식사와 함께 시작된 술자리는 시시콜콜한 수다와 함께 길어졌고, 알코올은 두 사람 사이의 벽을 한 겹 더 허물었다. 평소보다 더 과감하고, 더 솔직했던 밤. 백현은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이결의 뺨을 쓰다듬으며, 문득 떠오른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만약에… 우리가 센티넬이랑 가이드가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그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듯, 눈을 반짝였다. ARCH 요원이 아닌, 평범한 세상의 백현과 서이결.
"나는 아마… 여전히 간호사였을 거고. 너는… 음, 맨날 콜라 달고 사는 거 보니까 카페 아르바이트생? 아니면 인형 좋아하니까, 토이 디자이너 같은 거 하려나."
그는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킥킥 웃었다. 그러다 문득,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일하는 병원에, 네가 감기 걸려서 끙끙 앓으면서 오는 거야. 내가 주사 놔주려고 하는데, 네가 무섭다고 막 울먹거리고. 그럼 나는 그런 네가 너무 귀여워서, 다 낫고 나면 데이트하자고 슬쩍 쪽지를 쥐여주는 거지. 어때, 너무 영화 같나?"
그는 제법 그럴듯한 시나리오에 스스로 만족한 듯,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결의 코끝에 제 코를 부볐다.
"어떤 세상에서든, 나는 결국 너를 찾아냈을 거야. 그리고 분명, 또 너한테 반했겠지. 센티넬이든 아니든, 서이결은 서이결이니까. 나를 이렇게 정신 못 차리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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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4. 미래를 약속하는 순간]
백현의 생일이었다. 이결은 서툰 솜씨로 미역국을 끓이고, 하루 종일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최고의 하루를 선물했다. 밤은 그 선물의 화룡점정이었다. 세상 가장 다정한 축하와 사랑을 온몸으로 나눈 후, 그는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그녀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있잖아, 이결아."
평소의 능글맞은 톤이 아니었다. 조금은 망설이는 듯한, 진중한 목소리. 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 이결의 네 번째 손가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여기에… 내 걸로 뭔가 채워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오늘."
그는 시선을 들어,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그 어떤 장난기도 없이, 오직 확신과 진심만이 가득했다.
"파트너로서의 각인이나, 그런 거창한 게 아니라. 그냥… 백현이라는 남자가, 서이결이라는 여자한테 주고 싶은 아주 사적인 약속 같은 거. 네가 힘들 때, 내가 네 옆에 있겠다는 약속. 네가 기쁠 때, 내가 제일 먼저 축하해주겠다는 약속. 그리고 앞으로의 모든 생일을, 너와 함께 맞이하고 싶다는 약속."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조금 낯간지러운 말이었지만,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다시 한번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나랑 같이 살자, 이결아. 지금처럼 파트너로서 말고. 그냥… 평생을 함께하는 사람으로. 아직 반지는 준비 못 했는데… 그래도 대답, 지금 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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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5. 사소함의 소중함]
비 오는 휴일이었다. 두 사람은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밀린 영화를 보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며 게으른 하루를 보냈다. 빗소리는 아늑한 배경음악이 되어주었고,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는 세상 같았다. 정사는 특별한 이벤트가 아닌, 그저 휴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자연스러운 일과였다. 나른한 포만감 속에서, 백현은 창밖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결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내일 아침엔 김치찌개 끓여줄까? 아니면 오랜만에 팬케이크 해줄까."
지극히 일상적인 질문이었다. 그는 이결의 어깨에 턱을 괴고,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빗소리, 그녀의 숨소리, 서로의 심장박동.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소리들이었다.
비 오는 날엔 역시 김치찌개인데… 돼지고기 넉넉하게 넣고. 근데 또 너는 아침에 달달한 거 먹는 거 좋아하잖아. 시럽 듬뿍 뿌린 팬케이크에, 딸기 잔뜩 올려서.
그는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 으음… 하고 낮은 소리를 냈다. ARCH의 수석 메딕도, A급 가이드도 아닌, 그저 사랑하는 연인의 아침 메뉴를 고민하는 평범한 남자였다.
"아, 모르겠다. 그냥 둘 다 할까? 네가 김치찌개 한 입 먹고, 팬케이크 한 입 먹으면 되지. 단짠단짠, 최고잖아."
그는 실없는 소리를 하며 그녀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간질였다. 평범하고 사소한 대화. 하지만 그는 이 순간이 더없이 소중했다. 세상을 구하는 거창한 임무보다, 내일 아침 그녀에게 무엇을 먹일지 고민하는 이 순간이, 그에게는 삶의 이유이자 가장 큰 행복이었다.
"결정했어. 내일 아침은 김치찌개랑 팬케이크. 그러니까 이제 그만 자자. 내일 아침 맛있게 먹으려면, 지금부터 푹 자둬야지. 잘 자, 내 아기 돼지. 내일 아침에 두 그릇 먹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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