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첫 잔의 고백
백현이 소주를 따라주며 서이결의 잔에 술을 채웠다. 투명한 액체가 작은 잔 안에서 찰랑거렸다. 백현의 손놀림은 능숙했다. 의외의 주당답게 첫 잔을 가볍게 비운 백현은 입맛을 다시며 서이결을 바라보았다.
"이결아, 첫 잔은 원샷이지."
서이결이 잔을 들어 단번에 비웠다. 목이 꿀떡 움직이는 모습을 백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았다. 서이결이 잔을 내려놓으며 푸하하고 숨을 내쉬자, 백현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잘 마시네, 우리 수달이. 나 이거 은근 좋아하는 거 알지?"
백현이 자신의 잔에 맥주를 따르며 서이결 쪽으로 어깨를 기울였다. 두 사람의 어깨가 맞닿았다. 서이결이 뭐가요?라고 물었고, 백현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느릿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둘이 마시는 거. 밖에서는 맨날 사람들 사이에서 '퓨어쌤'이잖아. 근데 여기서는 그냥 현이 오빠지."
백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톤 낮았다. 술이 한 잔 들어가자 목소리의 결이 달라졌다. 나긋한 것은 여전했지만, 그 안에 묘한 나른함이 깔렸다. 서이결이 원래 오빤 오빠죠라고 당연하다는 듯 말하자, 백현은 피식 웃으며 서이결의 정수리에 턱을 올렸다.
"그치. 원래 오빠는 오빠지."
에피소드 2. 안주 전쟁
두 번째 잔이 비워질 무렵, 서이결이 접시 위의 치즈 큐브를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백현도 손을 뻗었는데, 하필 같은 조각을 향했다. 두 사람의 손가락 끝이 치즈 위에서 부딪혔다. 백현이 눈을 깜빡였다.
"어, 이거 내 거야."
서이결이 고개를 저으며 내 거라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보랏빛 눈동자가 장난기로 반짝였다. 백현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30세 성인 남성이 입술을 삐죽 내미는 모습은 객관적으로 우스꽝스러워야 하지만, 처진 눈매와 어우러지니 묘하게 귀여웠다.
"이결아, 오빠한테 양보 안 해?"
서이결이 치즈를 재빨리 낚아채 입에 넣으며 안 해요, 히히라고 웃었다.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백현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는 척했지만, 눈이 완전히 초승달이 되어 있었다. 백현은 새로운 치즈를 집어 서이결의 입 앞에 가져다 대었다.
"됐어, 이것도 먹어. 우리 이결이가 배고프니까."
서이결이 아무렇지 않게 백현의 손에서 직접 치즈를 받아 먹었다. 입술이 백현의 손가락 끝에 스쳤다. 백현의 귓바퀴가 빨개졌다. 술 때문이라고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절대 술 때문이다. 704일이 지나서도 이런 사소한 접촉에 귀가 빨개지는 건 분명 체질적인 문제다.
에피소드 3. 술게임이라 쓰고 애교라 읽는다
네 번째 잔이 채워질 즈음, 분위기는 한층 느슨해져 있었다. 백현의 볼이 복숭아처럼 상기되어 있었고, 서이결의 눈꼬리도 평소보다 더 내려앉아 있었다. 백현이 갑자기 빈 소주잔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으며 선언했다.
"이결아, 우리 게임 하자."
서이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현은 손가락을 세우며 규칙을 설명했다. 눈을 마주치고 먼저 웃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간단했다.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백현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서이결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소파 쿠션이 푹 꺼졌다. 두 사람의 무릎이 맞닿았다. 백현은 입을 꾹 다물고 무표정을 유지하려 했다. 검은 눈동자가 서이결의 보랏빛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3초.
백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5초.
서이결의 동그란 눈망울이 너무 가까이서 반짝이고 있었다. 술기운에 촉촉해진 보랏빛이 간접조명을 받아 자수정처럼 빛났다. 백현의 입술 양 끝이 경련하듯 올라가기 시작했다.
7초.
백현이 터졌다. 푸흡,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백현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소파 등받이로 고개를 젖혔다.
"아 진짜, 왜 이렇게 예뻐서 못 참겠어. 이게 게임이 돼?"
백현이 손가락 사이로 서이결을 훔쳐보며 투덜거렸다. 귓바퀴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술 때문이라고 또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백현은 벌칙으로 소주를 한 잔 더 따라 마셨다. 목이 꿀떡 움직이고, 입술을 핥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다시 해. 이번엔 진짜 안 웃어."
물론 결과는 뻔했다. 백현은 세 번 연속으로 졌다. 세 번 모두 7초를 넘기지 못했다. 서이결의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 보는 것 자체가 백현에게는 치명적인 핸디캡이었다. 세 번째로 졌을 때 백현은 아예 서이결의 무릎에 이마를 박으며 신음했다.
"이거 불공평해. 이결이가 너무 예쁜 건 반칙 아니야?"
에피소드 4. 눈과 소원
다섯 번째 잔 이후. 시계는 열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백현은 어느 순간 소파 팔걸이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 서이결을 자기 품 안으로 끌어들인 상태였다. 서이결의 등이 백현의 가슴팍에 기대어 있었고, 백현의 턱이 서이결의 정수리 위에 올려져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창밖을 향했다. 눈이 더 굵어져 있었다. 하얀 조각들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숙소의 유리창에 수증기가 맺혀 바깥 풍경이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백현이 서이결의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나른하고 부드러웠다. 술이 적당히 올라 모서리가 전부 둥글어진 목소리.
"이결아, 내일 새해잖아."
백현의 손가락이 서이결의 귀 뒤를 간질이듯 스쳤다. 하늘빛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작은 귀가 살짝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백현은 그 색깔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창밖의 눈은 마치 누군가 천장에서 솜을 뜯어 뿌리는 것처럼 고요하고 꾸준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숙소 안의 온기와 바깥의 한기가 유리창 위에서 만나 뿌옇게 번져 있었다. 백현은 서이결의 어깨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살짝 주며 코끝을 서이결의 정수리에 묻었다. 소다향에 소주향이 섞여 묘한 칵테일 같았다.
"새해 소원 같은 거 빌어? 나는 요즘 그런 거 안 빌거든."
백현이 느긋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서이결의 머리카락 사이로 웅웅 울렸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백현은 서이결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숨결이 닿을 만큼. 술 냄새와 치즈 냄새가 섞인 숨결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온도는 분명히 따뜻했다.
"빌 게 없어서. 다 있으니까."
그 말을 하는 백현의 목소리에는 과장이 없었다. 그저 사실을 말하는 사람의 담백한 톤이었다. 백현은 서이결의 손등 위에 자기 손을 포개며 손가락을 느슨하게 끼웠다. 서이결의 손은 여전히 약간 차가웠고, 백현의 손은 맥주캔을 쥐고 있던 탓에 미지근했다. 두 사람의 체온이 접촉면에서 천천히 섞였다.
백현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송이 하나가 유리창에 부딪혀 작은 물방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이 서이결의 능력을 떠올리게 했다. 물방울. 버블. 백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백현은 창밖을 보며 혼잣말처럼 이어갔다.
"작년 이맘때 뭐 했더라. 아, 의무실에서 야근했지. 폭주 징후 들어온 애가 셋이나 있어서 새해 카운트다운을 모니터 앞에서 했어."
백현이 웃었다. 쓸쓸한 웃음이 아니었다. 그냥 '지금이 너무 좋아서 과거가 우습다'는 종류의 웃음이었다. 백현의 엄지손가락이 서이결의 손등 위를 느리게 쓸었다. 원을 그리듯. 반복적이고 무의식적인 동작이었다.
"근데 올해는 이렇게 이결이 안고 있으니까. 인생 참 모르는 거지?"
백현이 고개를 숙여 서이결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가볍게 대었다. 키스라고 하기엔 너무 짧고, 스치는 것이라 하기엔 분명한 압력이 있었다. 백현은 입술을 뗀 뒤에도 코끝을 서이결의 머리카락에 묻은 채 눈을 감았다.
에피소드 5. 반지
시계가 열 시를 넘겼다. 테이블 위의 소주병은 3분의 2가 비어 있었고, 맥주캔은 네 개째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백현의 볼은 이제 복숭아를 넘어 석류에 가까운 빛깔이었다. 술이 오를수록 백현의 손이 부지런해졌다. 서이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어깨를 쓸다가, 손등을 어루만지다가, 손가락 사이사이를 탐색하듯 더듬었다. 마치 자기 손이 서이결에게서 떨어지면 안 된다는 본능이 작동하는 것처럼.
백현이 서이결의 왼손을 들어 올려 자기 눈앞에 가져왔다. 작은 손이었다. 백현의 손보다 두 마디는 짧은 손가락들. 그 약지에 끼워진 심플한 백금 밴드가 간접조명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백현은 그 반지를 엄지로 돌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안쪽에 물방울 있는 거 알지?"
백현이 느릿하게 물었다. 당연히 서이결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백현은 술이 들어가면 이미 아는 것도 다시 확인하고 싶어지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백현은 서이결의 손가락에 자기 입술을 대며 반지 위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이거 고를 때 진짜 고민 많이 했거든. 물방울로 할까, 수달로 할까."
백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달. 반지 안쪽에 수달을 새기려 했다는 소리를 진지하게 하고 있었다. 백현은 서이결의 표정을 살피며 변명하듯 덧붙였다.
"수달은 아무래도 좀 그렇잖아. 보석 가게 사장님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을 것 같아서."
백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눈이 초승달이 되었다. 처진 눈매가 한껏 구겨지며 웃음 주름이 잡혔다. 백현은 서이결의 손을 자기 볼에 갖다 대며 눈을 감았다. 서이결의 손바닥이 백현의 뜨거운 볼 위에 닿았다. 열감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이결이 손 시원해서 좋다."
백현이 고양이처럼 서이결의 손에 볼을 비볐다. 평소의 다정하고 어른스러운 '퓨어쌤'은 온데간데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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