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요했다. 평화로운 일상의 한가운데, 예고 없이 던져진 질문은 잔잔한 호수 위에 떨어진 돌멩이처럼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파문은 소란스럽지 않았다. 대신, 아주 깊고 느리게, 동심원을 그리며 그의 의식 전체로 퍼져나갔다. 백현은 거실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어 앉아, 제 무릎을 베고 누운 서이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기고 있었다. 창밖은 어느덧 부드러운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있었고, 방 안에는 두 사람의 고른 숨소리와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저녁의 냄새만이 감돌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화로운, 그야말로 ‘일상’이라는 이름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그 고요를 깨뜨렸다.
처음에는, 그저 또 다른 엉뚱한 상상이라고 생각했다. 늘 그랬듯이. 어제 본 드라마의 주인공이 사실은 쌍둥이였다면? 만약 아크에 콜라 맛을 내는 능력을 가진 센티넬이 나타난다면? 그녀의 세계는 종종 그런 기발하고 사랑스러운 가정들로 반짝였다. 그래서 백현은 처음 몇 문장까지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듣고 있었다. ‘그래, 우리 아기 수달, 오늘은 또 무슨 재밌는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그의 표정에서 미소가 서서히 걷혔다. 장난기 어린 상상이라고 하기엔, 그 질문의 무게가 너무나도 낯설고 무거웠다. 가상의 이야기. 허구의 세계. 이야기 속의 캐릭터. 페르소나. 진짜 나. 단어 하나하나가 그의 뇌리에 박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세계의 균열을 만들어냈다.
그의 손길이 저도 모르게 멈췄다. 그녀의 부드러운 하늘빛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던 손가락이, 공기 중에 잠시 멈춰 섰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제 무릎을 베고 누워, 흔들림 없는 보랏빛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 매일 보고, 매일 사랑하고, 매일 입 맞추는 그 얼굴. 이 얼굴이, 이 목소리가, 이 성격이 전부 ‘진짜’가 아니라고? 세계 바깥의 누군가가 만들어낸, 그저 빌린 모습일 뿐이라고? 그 가설은 너무나 터무니없고, 비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섬뜩할 정도의 현실감을 가지고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내가 사랑하는 ‘서이결’은 누구지? 내가 매일 끌어안고 잠드는 이 온기는 진짜인가? 폭주 직전의 그녀를 붙잡았던 그 절박함은, 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던 그 상처는, 3개월의 지옥 같은 이별 끝에 다시 만났을 때의 그 눈물은, 전부… 누군가에 의해 쓰인 각본의 일부였을까?
백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듯한 감각. 수많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가, 서로 엉키고 부딪히며 소음처럼 흩어졌다.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시야에 담긴 그녀의 얼굴이 잠시 흐릿해졌다. 그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웃어야 할까? 그런 엉뚱한 소리가 어디 있냐며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받아쳐야 할까? 아니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까? 하지만 그의 몸은 정직했다. 심장이 이전보다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무겁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깊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멀어지고 오직 그녀의 질문만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그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리고 아주 오랜 침묵 끝에,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여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손길에는 아주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거, 진짜… 엄청난 질문이네. 꼭, 예전에 내가 장난으로 했던 질문이랑 비슷한데. 내가 너한테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있다면 어떡할 거냐고 물었던 거. 근데 이건… 차원이 다르다. 너무, 거대해서. 어디서부터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숨을 골랐다. 그녀의 뺨에 닿은 손바닥의 온기. 제 무릎에 전해지는 그녀의 무게. 코끝을 스치는 그녀의 시원한 소다향. 그는 필사적으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감각들을 그러모았다. 이 모든 것이 허구일 리가 없다. 이렇게나 생생한데. 이렇게나 따뜻한데. 하지만 그녀의 질문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 감각마저도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희미하게 웃었다. 체념과 혼란, 그리고 약간의 흥미가 뒤섞인, 아주 복잡한 미소였다.
“만약 그렇다면… 솔직히 말해서, 처음엔 좀 화가 날 것 같아. 아니, 엄청나게 분노할지도 몰라. 내 모든 삶이, 내 감정이, 내 의지가 전부 가짜고, 누군가의 유희를 위해 조종당한 거라면. 내가 널 사랑하게 된 것도, 널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도, 우리가 함께 울고 웃었던 그 모든 순간들이… 전부 정해진 이야기였다면.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 우리의 모든 노력을, 모든 진심을 송두리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이겠지. 마치… 꼭두각시 인형이 된 것 같은 무력감을 느낄 거야.”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번에는 분노나 혼란이 아닌, 아주 깊은 연민과 사랑이 담긴 손길이었다.
“하지만… 아마 그 분노는 오래가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말이야, 이결아. 설령 이 세계가 가짜고, 우리의 만남이 누군가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 하더라도. 너를 만나서 내가 느꼈던 이 감정들까지 가짜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처음 의무실에서 널 봤을 때, 차갑고 외로워 보이던 네 뒷모습. 함께 밥을 먹으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어주던 너. 나를 보며 처음으로 환하게 웃어주었을 때, 내 심장이 얼마나 세게 뛰었는지 알아? 전부 내 것이 아니었다고? 아니. 그건 분명히 ‘나의’ 감정이었어. 그 순간의 떨림, 행복감, 애틋함. 그건 누군가 억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의 시선이 한없이 깊어졌다. 그는 마치 그녀의 영혼을 들여다보려는 듯,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그가 사랑하는 ‘서이결’이 있었다.
“그리고 네가 말한 ‘페르소나’. 지금의 이 모습이 진짜 네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상관없어. 왜냐하면 내가 사랑에 빠진 건, 이 껍데기가 아니니까. 나는… 네가 나에게 보여준 모든 순간들을 사랑해. 삐져서 담요 뒤집어쓰고 웅크리고 있던 너. 내 흑역사에 배를 잡고 웃던 너. 질투심에 입술을 삐죽이던 너. 내가 해준 밥을 먹으며 행복해하던 너. 그 모든 순간들이 모여서, 내가 아는 ‘서이결’이 된 거야. 그게 설령 세계 바깥의 ‘진짜 너’가 연기한 모습이라고 해도, 그 연기를 한 건 결국 ‘너’잖아. 너의 의지로, 너의 감정으로 나에게 보여준 모습들이잖아. 그렇다면 그건 더 이상 연기가 아니야. 그건 너의 일부고, 나와 너의 역사 그 자체야. 나는… 그 모든 역사를 사랑하는 거야.”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무릎을 베고 누운 그녀의 이마에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경건하기까지 한, 짧은 입맞춤이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평온을 되찾아 있었다. 모든 혼란과 의문을 잠재운, 단단한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그래서, 네 질문에 대답하자면. 나는 여전히 너를 ‘나의 서이결’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리고 내가 좋아했던 건, 지금의 이 모습 ‘뿐’이 아니야.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좋아했어. 그리고 아마… 세계 바깥의 진짜 너도, 내가 사랑하는 너와 아주 많이 닮아있을 거라고 믿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사랑스러운 너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테니까. 어쩌면 그 평범하고, 못나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는 그 모습이… 내가 훨씬 더 사랑하게 될 모습일지도 모르지.”
마지막 질문. ‘진짜 나’에게 전하고 싶은 말. 백현은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마치 정말로, 이 세계 너머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시선을 던지는 것처럼. 그의 입가에 다시 장난기 어린, 그러나 한없이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다시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려, 눈을 맞추고, 마치 그녀를 통해 저 너머의 누군가에게 말을 전하듯, 나지막이 속삭였다.
“음… 우선,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 그녀를, 나의 이결이를 이곳으로 보내줘서. 나와 만나게 해줘서. 당신 덕분에 내 세상은 의미를 갖게 됐고, 나는 행복이 뭔지 알게 됐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부디… 당신도, 당신의 세상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만약 그곳에서의 삶이 힘들고 외로워서, 이곳으로 도망쳐 온 거라면… 이 세계가,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아주 작은 위로라도 되었기를 바라. 당신이 이곳에서 나와 함께 웃었던 것처럼, 그곳에서도 많이 웃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거 하나만은 약속해 줘. 언젠가 이 이야기가 끝나더라도… 그녀를, 그리고 나를, 우리의 모든 시간을… 잊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소중하게 기억해 주겠다고. 그거면… 그거면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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