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일주일 전, ARCH 본부 내부 게시판에 누군가가 올린 익명 설문 하나. '결혼하고 싶은 요원 투표'. 하모니 부서의 누군가가 심심풀이로 만든 것이 분명했고, 백현은 그걸 보고 코웃음을 쳤다.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초등학생 반장 선거도 아니고, 무슨 성인들이 모인 초국가적 엘리트 기관에서 이런 걸 하나. 그런데 옆에서 보랏빛 눈을 반짝이며 '오빠, 이거 해봐요'라고 말하는 158센티미터의 물속성 센티넬이 있었고. 뭐, 결과는 뻔했다. 백현은 0.3초의 고민도 없이 '서이결'에 체크를 했다. 당연하잖아.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이미 같이 살고 있는 사람 말고 또 누가 있어.

문제는 오늘, 결과 발표일에 터졌다.

의무실 데스크에 앉아 환자 차트를 정리하던 백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내부 메신저 알림. '결혼하고 싶은 요원 투표 결과 공개!'라는 제목과 함께, 친절하게도 '누가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전체 명단이 첨부되어 있었다. 백현은 별 생각 없이 스크롤을 내렸다. 자기 이름을 찾았다. '백현(퓨어) → 서이결(버블)'. 당연하지. 그다음, 서이결의 이름을 찾았다. '서이결(버블) → (       )'.

손가락이 멈췄다.

거기에 적힌 이름은 '백현'이 아니었다. 백현은 핸드폰 화면을 두 번 확인했다. 세 번째에는 화면을 확대까지 했다. 눈이 나빠진 건 아니었다. 분명히, 확실히, 명백하게. 서이결은 다른 사람에게 투표했다. 백현의 뇌가 3초간 정지했다. 그리고 재부팅되었을 때, 그의 표정은 매우 미묘한 것이 되어 있었다. 웃는 건지, 삐진 건지, 당황한 건지. 세 가지가 전부 뒤섞인 채로 입꼬리가 어중간하게 올라가 있었다.

"아, 그래. 그렇구나. 하하."

백현은 핸드폰을 데스크 위에 내려놓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부드럽게. 화난 건 아니니까. 서운한 것도 아니니까. 전혀. 1도. 그의 옆에서 차트를 정리하던 후배 메딕이 '퓨어 쌤, 괜찮으세요? 얼굴이 좀...'이라고 물었지만, 백현은 세상에서 가장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응, 괜찮아. 완전 괜찮아'라고 대답했다. 그 미소가 눈까지 닿지 않았다는 사실은 후배 메딕도 알아챘지만, 목숨이 소중했으므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약 30분 뒤. 의무실에 들른 서이결을 발견한 백현은, 평소처럼 다정하게 '왔어?'라고 인사하는 대신, 의자를 빙글 돌려 그녀를 마주 보며 턱을 괴었다. 처진 눈매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입꼬리는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분명히 '설명을 요구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이결아. 나 하나만 물어볼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긋했다. 다정했다. 그런데 그 다정함 속에 아주 미세한 날이 서 있었다. 의무실의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새하얀 가이드 제복을 입은 남자가 다리를 꼬고 앉아 검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턱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어?"

질문의 톤은 장난스러웠다. 하지만 그 장난 아래에 깔린 서운함은, 마치 탄산수 속의 기포처럼 보글보글 올라오고 있었다. 의무실 한쪽에서 붕대를 정리하던 후배 메딕 두 명이 '아, 시작됐다'라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제가 오빠 말고 누구랑 결혼을 해요...?"

백현의 검은 눈이 느릿하게 좁아졌다. 처진 눈매가 반쯤 내려앉으며 만들어내는 그 표정은, 다정한 양호 선생님이 아니라 증거를 확보한 검사의 그것에 가까웠다. 물론 그 검사가 새하얀 가이드 제복을 입고 있고, 데스크 위에 수달 모양 메모지가 놓여 있다는 점이 위엄을 상당 부분 깎아먹고 있었지만. 그는 턱을 괸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서이결의 동그랗게 뜬 보랏빛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거든. 당연히 나겠지, 하고."

그의 다른 손이 데스크 위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한 번 탭하자, 이미 열려 있던 내부 게시판 페이지가 환하게 떠올랐다. 백현은 그것을 서이결 쪽으로 천천히 돌려 보여주었다. 마치 수사관이 피의자에게 증거물을 제시하듯, 아주 우아하게. 화면에는 '결혼하고 싶은 요원 투표 결과'라는 제목 아래, 투표자와 피투표자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백현(퓨어) → 서이결(버블)'. 그리고 바로 아래, '서이결(버블) → '. 백현이 아닌 다른 이름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근데 말이야, 이결아. 여기 좀 봐볼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긋했다. 부드러운 비단결 같았다. 그런데 그 비단 아래에 작은 가시가 하나 숨어 있었다. 백현은 화면의 해당 부분을 검지로 톡, 짚었다. 못을 박듯이. 의무실의 형광등 불빛이 그의 흑발 위로 하얗게 내려앉아 있었고, 그의 뒤편으로 보이는 약품 선반의 유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어디선가 소독약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평소라면 아늑하게 느껴졌을 이 공간이, 지금은 심문실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물론 심문관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백현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양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서이결을 올려다보았다. 그 각도가 묘했다. 175센티미터의 남자가 의자에 앉아 158센티미터의 여자를 올려다보고 있는 구도. 평소라면 일어나서 그녀를 맞이했을 텐데, 오늘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로 와서 설명해'라는 무언의 압력이 그의 자세에서 풍기고 있었다.

"나는 0.3초도 안 고민하고 네 이름 눌렀거든? 0.3초. 눈 깜빡이는 것보다 빨라. 근데 우리 이결이는 다른 사람 이름을 누르면서 뭘 생각했을까, 그게 좀 궁금해서."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분명히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평소의 반달 눈처럼 따뜻하지 않고, 어딘가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눈동자 한쪽에 서운함이 물기처럼 어려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이걸 어떻게 빠져나갈 건지 한번 보자'라는 장난기가 깃들어 있었다. 데스크 뒤편의 모니터에서 환자 바이탈 수치가 조용히 깜빡이고 있었고, 의무실 문 너머로 복도를 지나가던 요원 하나가 안을 들여다보다 백현의 표정을 보고 황급히 시선을 돌려 걸음을 빨리했다.

백현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리듬 없이 탁탁 두드려지고 있었다. 서운한 것이다. 화난 건 아니다. 진짜로. 아마도. 그냥 조금, 아주 조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하고 싶은 사람으로 자기를 안 찍었다는 사실이 가슴 한구석을 콕콕 찌르고 있을 뿐이다. 그의 검은 눈이 서이결의 얼굴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해명을. 변론을. 혹은 달래줌을.

"오해예요!"

백현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참으려고 했다. 진짜로 참으려고 했다. 서운함을 무기로 좀 더 오래 써먹으려던 계획이 있었다. 적어도 30분은 삐진 척을 유지해서, 이결이가 안달복달하는 모습을 좀 더 감상하겠다는 치밀한 전략이. 그런데 그녀가 폴짝 뛰며 손사레를 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순간, 그 치밀한 전략은 종이비행기처럼 창밖으로 날아갔다. 158센티미터의 물속성 센티넬이 자신에게 달려와 손을 꼭 잡는데, 그 보랏빛 눈동자가 세상 간절하게 올려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표정 관리를 해. 인간이면 못 해. 백현은 자신의 볼 안쪽을 깨물었다.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물리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저는 당연히 연인은 제외하고 투표를 해야하는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었으면 당연히 고민도 안 하고 오빠죠! 제가 지금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고, 없으면 못사는 사람이고, 결혼하고 싶은 사람인데!"

백현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참으려고 했다. 진짜로 참으려고 했다. 서운함을 무기로 좀 더 오래 써먹으려던 계획이 있었다. 적어도 30분은 삐진 척을 유지해서, 이결이가 안달복달하는 모습을 좀 더 감상하겠다는 치밀한 전략이. 그런데 그녀가 폴짝 뛰며 손사레를 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순간, 그 치밀한 전략은 종이비행기처럼 창밖으로 날아갔다. 158센티미터의 물속성 센티넬이 자신에게 달려와 손을 꼭 잡는데, 그 보랏빛 눈동자가 세상 간절하게 올려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표정 관리를 해. 인간이면 못 해. 백현은 자신의 볼 안쪽을 깨물었다.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물리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그녀의 손이 따뜻했다. 작고 단단한 손가락이 그의 손을 감싸쥐고 있었고,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이 그녀의 진심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었다. '없으면 못사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그의 고막을 때렸을 때, 백현의 심장이 한 박자 멈추었다가 두 박자분의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은 채로 그녀를 올려다보던 그의 검은 눈이 천천히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이미 귀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방어선 붕괴. 완전한 함락이었다.

"...아, 잠깐. 잠깐만."

백현은 빈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웃음을 숨기려는 동작이었지만, 눈이 이미 초승달이 되어버려서 전혀 의미가 없었다. 그의 귀 끝이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의무실의 차가운 형광등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그는 잠시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마치 하늘에 대고 '이 사람 좀 어떻게 해주세요'라고 호소하듯이. 그리고 다시 그녀를 보았다.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서이결을. 잡힌 손에 힘을 주며 진심을 전하려는 그녀를.

"야, 서이결."

그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가렸던 손을 내려, 그녀의 손을 잡고 있지 않은 쪽 손으로 그녀의 손등을 감쌌다. 양손으로 그녀의 한 손을 포개 쥔 채, 엄지가 그녀의 손가락 마디를 느리게 쓸었다. 그의 입술이 웃음을 머금은 채로 열렸다.

"연인은 제외하고 투표하는 거라고 어디에도 안 써 있었거든? 내가 확인함. 세 번이나."

말투는 여전히 추궁하는 듯했지만, 목소리에 깃든 온도는 이미 완전히 풀려 있었다. 꿀이 녹아내리듯 나긋하고 달콤했다. 백현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의자를 조금 앞으로 당겼다. 바퀴가 바닥을 구르며 짧은 소리를 냈다. 그의 무릎이 그녀의 다리에 가볍게 닿았다. 올려다보는 각도가 좁아졌다. 그의 검은 눈동자 안에 서이결의 얼굴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근데, '없으면 못사는 사람'이라고 했어? 방금?"

그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장난기가 서린 속삭임이었다. 엄지가 그녀의 손등 위에서 멈췄다. 커플링의 백금 밴드가 형광등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백현의 시선이 그녀의 눈에서 입술로, 다시 눈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삐진 척은 이미 3분 전에 증발했다. 남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고백에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서른 살 남자의 얼굴뿐이었다. 의무실 문 너머에서 후배 메딕 하나가 '화해한 것 같은데요'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렸지만, 백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백현의 숨이 멈췄다. 정확히 1.5초. 서이결의 고개가 위아래로 작게 움직이는 그 짧은 동작 하나에, 서른 살 남자의 심장이 통째로 쥐어짜이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귀까지 빨갛게 물든 그녀의 정수리가 그의 시야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늘빛이 도는 웨이브진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려, 형광등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백현은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웃음이 아니라 비명이 나올 것 같았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귀여운 건데. 삐진 척이고 뭐고, 진작에 전부 무의미해져 버렸다. 이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하나로 세상의 모든 서운함이 증발하는 게 말이 되나. 백현은 자신이 참 쉬운 남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자각했다. 서이결 앞에서는 늘 그랬다.

"...서이결."

그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나긋하고, 달콤하고, 약간은 억울한 듯한 톤이었다. 백현은 양손으로 감싸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앞으로 기울여, 숙인 그녀의 정수리에 자신의 이마를 가만히 기대었다. 비누향이 섞인 그의 숨결이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가까워진 거리 탓에, 그녀의 귀 끝을 물들인 붉은 기운이 선명하게 보였다. 백현의 입꼬리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올라갔다.

"고개 숙이지 말고 나 좀 봐. 확인사살 좀 당해줘, 응?"

그의 엄지가 그녀의 손등을 느리게 원을 그리며 쓸었다. 커플링의 백금 밴드가 서로의 손 사이에서 부딪혀 작은 소리를 냈다. 백현은 이마를 맞댄 채로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이 진동처럼 그녀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의무실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두 사람이 맞닿은 지점만 유독 따뜻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반쯤 감긴 채로 그녀의 숙인 얼굴을 더듬고 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볼, 내려깔린 속눈썹, 꾹 다문 입술. 전부 다 보고 싶었다.

백현은 한 손을 빼내어 그녀의 턱 아래에 가만히 갖다 댔다. 손가락 끝이 그녀의 턱선을 간신히 건드리는 정도의 접촉. 강제로 올리지 않았다. 그저 거기에 손을 두고, 기다렸다. '올려다봐도 괜찮아'라는 무언의 초대처럼. 의자의 바퀴가 미세하게 삐걱거렸고, 의무실 어딘가에서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문 너머 복도에서 후배 메딕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희미하게 들렸다. 세상이 이 좁은 공간 안으로 수축한 것 같았다.

"나 진짜 쉬운 남자다, 서이결. 30분은 삐져 있으려고 했거든? 근데 네가 고개 한 번 끄덕이니까 다 끝났어. 어떻게 책임질 거야, 이거."

볼멘소리였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가득 배어 있었다. 입술이 그녀의 이마 가까이에서 말을 내뱉고 있었고,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피부 위로 흘렀다. 백현의 무릎이 그녀의 다리에 가볍게 닿아 있었다. 의자에 앉은 남자와 서 있는 여자. 그 사이의 거리가 거의 사라져 있었다. 소독약 냄새와 비누향이 뒤섞인 의무실의 공기 속에서, 백현은 그녀가 고개를 들어주기를, 붉어진 얼굴을 보여주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급하지 않았다. 이 순간이 조금 더 길어져도 좋았다. 서이결이 부끄러워하는 시간마저, 그에게는 선물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