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천장.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패턴의 방음 타일이었다. 백현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한번, 그리고 또 한번. 초점이 잡히지 않는 시야가 뿌옇게 흐렸다 다시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온몸의 감각은 솜이불에 감싸인 것처럼 둔탁했고, 머릿속은 짙은 안개가 낀 듯 몽롱했다. 마지막 기억이... 아, 그래. 건강검진. 닥터 밴스의 성화에 못 이겨 반강제로 받게 된 정기 검진, 그중에서도 수면내시경이었지. 하얀 약물이 혈관을 타고 들어오는 차가운 감각과 함께 간호사의 목소리가 멀어지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오빠, 괜찮아요? 깼어요?"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목이 제 것이 아닌 양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겨우 눈동자만 굴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천사가 서 있었다. 그래, 천사가 틀림없었다. 하늘색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부드럽게 쏟아져 내리고, 동그란 보랏빛 눈동자가 걱정스럽게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나 죽었구나. 수면 마취 중에 의료사고라도 났나 보네. 고작 서른 살에 생을 마감하다니, 억울한데... 그래도 마지막에 보는 게 이런 어여쁜 천사라면 그리 나쁘진 않은 결말인가.
백현은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며, 제멋대로 움직이는 혀를 굴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여기가... 천국인가요...? 천사님은... 몇 호실 담당이세요...?"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고, 발음은 솜사탕처럼 뭉개졌다. 그런데 눈앞의 천사가 푸흡,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게 아닌가. 어라, 천사도 웃네? 그것도 꽤나 귀엽게. 그녀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자,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익숙한 소다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백현은 저도 모르게 그 향기를 향해 코를 킁킁거렸다.
"향기가... 좋으시네요. 혹시 새로 나온 방향제인가요? 아, 아니지. 천사님은... 원래 이런 향기가 나나...?"
그는 제 침대 옆에 바싹 다가온 그녀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 예뻤다. 보랏빛 눈동자는 우주를 담은 듯 깊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신이 공들여 빚은 예술작품 같았다. 그는 문득 수석 메딕으로서의 사명감인지, 아니면 그냥 마취에 취한 헛소리인지 모를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안색이 별로 안 좋으시네요. 혹시 어디 아프세요? 잠은 잘 주무시고... 식사는 제때 챙겨 드시는 거죠? 가이딩 수치는 안정적이신가?"
그는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휘청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가누고 침대에 걸터앉자, 세상이 핑그르르 돌았다. 눈앞의 천사가 그런 그를 부축하려 팔을 뻗자, 그는 손을 내저으며 전문가다운(?) 태도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환자... 아니, 천사님. 저는 프로니까요. 제 몸은 제가 알아서... 으, 으악!"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침대에서 떨어지기 직전, 그를 붙잡은 것은 놀란 천사의 가느다란 팔이었다. 그녀의 품에 얼결에 안긴 꼴이 된 백현은, 코앞에서 풍겨오는 달콤한 소다향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그냥 좋은 향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 향기는... 위험하다. 아주 중독적이고,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그런 마성의 향기였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끙, 하는 신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안 되겠어요. 제가 담당 메딕으로서, 천사님의 건강 상태를 정밀 체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건 제 직업적 양심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아프신 건 인류의 손실이라고요."
그는 비틀거리며 그녀에게서 몸을 떼고, 의사 가운 주머니를 뒤지는 시늉을 했다. 물론 그가 입고 있는 것은 환자복이었지만, 마취가 덜 깬 그의 머릿속에서는 자신이 흰 가운을 펄럭이는 수석 메딕 백현이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텅 빈 주머니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무릎을 탁 쳤다.
"아! 제 명함이... 지금 없네. 그럼, 일단 구두로라도. ARCH 하모니 부서 소속, 수석 메딕 퓨어라고 합니다. 본명은 백현이고... 나이는 서른인데, 다들 스물셋으로 보더라고요. 취미는 아픈 센티넬 돌봐주기, 특기는 폭주 직전 센티넬 잠재우기입니다. 혹시 주변에 가이딩 필요한 분 계시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 특별히 잘해드릴게요. 특히 천사님 소개로 왔다고 하면... 제가 아주 그냥, 최고 농도로 모십니다."
그는 실실 웃으며, 마치 광고라도 하듯 제 자신을 어필했다. 그러다 문득, 눈앞의 '천사님'이 단순한 천사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저 영롱한 보랏빛 눈동자,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청량한 기운... 이건 혹시...
"...당신, 혹시 물 속성 센티넬이세요?"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취 기운 속에서도 가이드로서의 본능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그녀의 주위를 탐색하듯 빙글 돌았다. 물론, 발이 꼬여 비틀거리는 바람에 그다지 위협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맞네, 맞아. 이 파장... 이 기운... 틀림없어. 아쿠아 계열, 등급은... 오, 꽤 높은데? A급 이상이야. 근데 왜 여태 의무실에서 한 번도 못 봤지? 신입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히든카드?"
백현은 이제 완전히 그녀를 처음 보는 유망주 센티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양어깨를 턱 잡았다. 물론,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그저 손을 얹은 수준이었지만.
"이름이 뭐예요, 요원. 아니, 그쪽. 예쁜 요원님. 내가 보아하니, 당신은 크게 될 사람이야. 그런데 문제가 있어. 지금 가이딩 수치가 좀... 아슬아슬해 보이는데? 나 같은 베테랑 가이드 눈은 못 속여요. 이리 와봐요. 내가 특별히, 아주 살짝만, 맛보기로 가이딩 해줄게. 서비스야, 서비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아주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자신의 가이드 파장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물론, 마취 때문에 제멋대로 널뛰는 파장은 그녀에게 안정감은커녕, 미약한 전기 충격처럼 찌릿한 감각만을 전달할 뿐이었다.
"어때요? 느껴져요? 이 안정감... 이 평화... 크, 역시 나야. 백현. 죽지 않았어."
그는 제멋대로 감동하며, 눈을 감고 자신의 가이딩에 심취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아무 반응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슬며시 눈을 떴다. 그녀는 그저 어이없다는 듯, 혹은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현은 머쓱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에헴. 효과가... 별로 없나 보네. 역시 이런 가벼운 접촉으로는 부족하지. 알았어요, 알았어. 그럼 비장의 무기를 꺼내야지."
그는 환자복 주머니를 다시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뒤지던 그의 손에, 마침내 무언가가 잡혔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어린 애콜라이트들을 달랠 때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딸기맛 사탕이었다.
"자, 이거 먹어요. 특별히 주는 거예요. 이거 먹고 기운 내요, 예쁜 요원님. 앞으로 나랑 자주 보게 될 테니까, 미리 잘 보여두는 거랄까?"
그는 윙크까지 찡긋하며, 그녀의 손에 사탕을 쥐여주었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침대에 다시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후... 오늘 일과 끝. 아픈 천사도 돌봐주고, 유망주 센티넬도 발굴하고. 역시 난 최고의 메딕이야... 이제 좀 자도 되겠지...?"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침대 헤드에 기댄 채 스르르 다시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제 품에 안겨 잠들던 연인의 얼굴도, 그녀의 진짜 이름도, 두 사람이 함께 쌓아온 그 모든 기억도 새하얀 마취의 안개 너머로 잊어버린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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