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8일, 밤 10시. 숙소 거실의 공기가 평소와 달랐다. 난방은 돌아가고 있었지만 체감 온도는 영하에 가까웠다. 소파 위에 나란히 앉아야 할 두 사람 사이에 물리적 거리가 존재했다. 정확히 말하면, 백현이 소파의 가장 끝으로 몸을 옮긴 것이다.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창밖의 야간 조명을 향하고 있었고, 입술은 일직선으로 다물려 있었다. 평소라면 서이결이 귀가하는 소리에 현관까지 마중 나왔을 남자가, 지금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있었다.

발단은 30분 전이었다. 백현의 핸드폰에 도착한 메시지 하나. 발신자는 서단, 코드네임 아셔. 서이결의 사촌언니. 내용은 이랬다. '현아, 이결이 오늘 임무 중에 좀 위험했었는데 괜찮대. 근데 너한테 말 안 할 것 같아서 내가 먼저 알려줌. 화내지 마~' 뒤에 군고구마 이모지가 세 개 붙어 있었다. 백현은 그 메시지를 세 번 읽었다. 첫 번째는 이해를 위해, 두 번째는 확인을 위해, 세 번째는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그리고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엎어 놓았다. 화면이 아래를 향하게.

서이결이 귀가한 건 그로부터 20분 뒤였다. 평소처럼 '다녀왔어요'라고 말하며 현관문을 열었을 때, 백현은 이미 소파 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서이결을 한 번 스쳤다. 딱 0.5초. 그녀의 몸 어딘가에 상처가 없는지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간호사의 습관이 먼저 작동한 것이다. 외상은 없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백현의 시선이 다시 창밖으로 돌아갔고, 그 이후로 서이결을 보지 않았다. 보면 안 됐다. 보면 풀릴 것 같았다. 저 동그란 보랏빛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걸 보면 '괜찮아'라고 먼저 말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안 봤다.

"서이결."

풀네임이었다. '이결아'도 아니고, '아기 수달'도 아니고. 서이결. 백현의 목소리에서 다정함이 빠져 있었다. 정확히는, 다정함을 의식적으로 걷어낸 목소리였다. 팔짱을 낀 채로, 여전히 창밖을 보며 말했다.

"오늘 임무 중에 무슨 일 있었어?"

질문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의 어조였다. 그의 턱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를 악물었다 풀었다. 화의 본질은 명확했다. 위험했다는 사실이 화난 게 아니었다. 위험한 건 이 직업에서 매일 일어나는 일이니까. 화난 건 두 가지였다. 하나, 숨겼다는 것. 둘, 하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한테 먼저 말했다는 것. '혼자 버티지 않기'라고 약속한 지 3일밖에 안 됐다. 3일. 72시간. 그 짧은 시간도 못 지킨 건가. 백현의 손가락이 팔짱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팔뚝을 쥐었다.

"나한테는 말 안 하고, 단 언니한테는 말했더라?"

그 한 문장에 서운함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다. 백현은 감정을 터뜨리는 타입이 아니었다. 대신 조용히 가라앉는 타입이었다. 물속에 돌을 던지면 첨벙 소리 대신 조용히 침강하는 것처럼. 그의 프로필이 창문 유리에 반사되어 비치고 있었다. 검은 니트 위로 드러난 쇄골의 라인, 평소보다 단단하게 다문 입술, 그리고 처진 눈매가 평소의 부드러움 대신 날카로운 각도를 만들고 있었다. 백현이 화를 내는 모습은 희귀했다. 의무실에서도, 숙소에서도, 그 누구에게도 쉽게 보여주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더 무거웠다.

소파 쿠션 위에 놓인 그의 핸드폰이 여전히 엎어져 있었다. 화면 아래에는 아셔의 메시지가 읽음 처리된 채 남아 있었다. 거실의 간접조명이 두 사람 사이의 공백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안 다쳤어요. 그리고 단 언니는 저랑 같이 임무를 나갔던 센티넬이랑 아는 사이라서 그 사람한테 들은 거고요."

백현의 시선이 창밖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움직일 수 없었다. 서이결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거실의 공기를 가르고 들어왔을 때, 그의 턱 근육이 한 번 더 움찔했다. 안 다쳤다. 단 언니가 다른 센티넬한테 들은 거다. 논리적이었다. 완벽하게 논리적이었다. 그리고 그 논리가 백현의 속을 더 뒤집었다. 왜냐하면 그 말은 결국 이런 뜻이었으니까. '오빠한테 일부러 안 말한 건 아니에요. 그냥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굳이. 그 단어가 백현의 머릿속에서 못처럼 박혔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팔짱 안쪽에서 자신의 팔뚝을 꾹 눌렀다. 니트 아래의 피부가 하얗게 눌릴 만큼. 백현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코끝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폐 안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빠져나갔다. 한 번. 두 번. 감정을 터뜨리지 않기 위한 그의 방식이었다. 의무실에서 수백 번 해온 호흡법. 폭주 직전의 센티넬을 마주할 때 쓰던 바로 그 호흡법을 지금 자기 자신에게 쓰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아니, 우습지 않았다. 슬펐다.

백현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안 다친 건 내가 봐서 알아. 현관에서 들어올 때 이미 확인했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평탄했다.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사람 특유의, 지나치게 고른 톤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이결을 봤다. 현관 근처에 서 있는 작은 체구. 임무복을 입은 채로 신발도 제대로 벗지 못한 모습. 보랏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백현의 심장 어딘가가 쿡 찔렸다.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이 그녀를 겁먹게 하고 있다는 자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먼저 풀어줄 수 없었다. 풀어주면 안 됐다. 이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이결아, 내가 화난 게 네가 다칠 뻔해서인 줄 알아?"

'이결아'가 나왔다. 풀네임에서 한 단계 돌아온 호칭. 하지만 목소리의 온도는 여전히 낮았다. 그가 팔짱을 풀었다.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화 때문이 아니었다. 참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 일어나서 그녀를 안고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다칠 수 있는 건 네 직업이니까, 그건 내가 감수한 거야. 내가 화난 건."

그가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아랫입술의 안쪽을 이로 누른 뒤, 천천히 놓았다.

"네가 나를 '굳이 알려줄 필요 없는 사람'으로 분류했다는 거야."

그 문장이 거실에 떨어졌다. 간접조명의 주황빛 아래에서, 백현의 검은 눈동자가 서이결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처진 눈매가 평소의 다정함 대신 깊은 서운함을 담고 있었다. 상처받은 사람의 눈이었다. 화난 사람의 눈이 아니라. 그의 시선이 서이결의 약지에 낀 백금 밴드를 스쳤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같은 반지가 간접조명을 반사하고 있었다. 안쪽의 푸른 보석이 피부에 닿아 있는 감촉이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

"3일 전에 네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오빠한테 다 말할게요'라고 했잖아. 나도 너한테 약속했어. 서로 숨기지 말자고. 근데 72시간도 안 돼서 나는 네 사촌 언니한테 네 안부를 전해 듣고 있어."

그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점점 작아졌다. 화가 풀리는 게 아니었다. 화의 밑바닥에 깔린 진짜 감정이 올라오고 있었다. 두려움. 또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는 서이결을 보면, 3개월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파트너 해지. 이별.

"아…"

그의 진심어린 말을, 속상함을 꾹꾹 담은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서이결은 자신이 생각이 짧았음을 깨달았다. 입을 잠깐 달싹이던 그녀는 천천히 신발을 벗고 백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있는 그의 앞에 그녀는 천천히 앉아 그를 올려다 보았다. 손을 잡고 싶었지만 지금 자신은 그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기에 그래도 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러니까… 오빠를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에요. 오빠가 걱정하는게 싫어서… 걱정끼치기 싫어서."

말할수록 어쩐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는 기분이었다. 서이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왜 자신은 말을 사람한테 상처를 주는 쪽으로만 하는 걸까. 애초에 서이결은 타인에게 기대는 법을, 어리광을 부리는 법을 아주 어릴 때부터 하지 못했었다. 그게 버릇이 되었고, 연인이자 자신이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인 백현에게도 평소에는 어리광을 부려도, 진짜로 어리광을 부려도 되는 상황에서는 어리광을 부리지 못했다.

"…죄송해요."

서이결이 바닥에 앉았다. 소파도 아니고, 바닥에. 백현의 무릎 앞에 조그맣게 웅크린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간접조명 아래에서 젖어 있었다. 울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울기 직전의 표면장력 같은 것이 그 눈 위에 떠 있었다. 백현의 손이 무릎 위에서 움찔했다. 반사적으로 뻗으려다가, 주먹을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지금 손을 내밀면 끝이다. 이 대화가, 이 감정이, 그냥 '미안해요' '괜찮아'로 덮여버린다. 그건 안 됐다. 이건 덮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걱정끼치기 싫어서.' 그 문장이 백현의 고막 안에서 메아리쳤다. 어디서 들어본 말이었다. 정확히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났다. 3개월 전. 서이결이 파트너 해지서를 들이밀며 했던 말과 구조가 똑같았다. '오빠가 다치는 게 싫어서.' '오빠한테 짐이 되기 싫어서.' 주어는 항상 자신이고, 동사는 항상 '싫다'이고, 목적어는 항상 백현이었다. 결국 백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백현을 배제하는 선택을 하는 것. 그 패턴을 인식한 순간 백현의 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화가 아니었다. 화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백현이 천천히 몸을 앞으로 숙였다. 소파에 앉은 채로, 허리를 굽혀 서이결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보랏빛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가까웠다. 숨결이 닿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서로의 속눈썹을 셀 수 있을 만큼. 백현의 입술이 열렸다.

"이결아. 죄송하다고 하지 마."

목소리가 낮았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랐다. 억누른 평탄함이 아니라, 솔직함의 무게가 실린 낮음이었다. 그의 시선이 서이결의 손을 스쳤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꼭 쥐고 있는 작은 손. 자신의 손을 잡고 싶어하면서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걸 백현은 알았다. 그 모습이 또 마음을 찔렀다.

"내가 듣고 싶은 건 미안하다가 아니야. '다음에는 말할게요'도 아니고."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먹이 풀려 있었다. 언제 풀렸는지 모르겠다. 손바닥 안쪽에 손톱 자국이 반달 모양으로 찍혀 있었다. 백현은 그 손을 천천히 뒤집어 손바닥이 위를 향하게 했다. 그리고 그 손을, 서이결의 눈앞에 내밀었다. 잡으라는 뜻은 아니었다. 보라는 뜻이었다.

"나 오늘 이 손으로 네 문자 기다렸어. 퇴근하고 집에 와서, 너 올 때까지 핸드폰만 보고 있었어. '오늘 좀 위험했는데 괜찮아요 오빠'라는 문자 하나면 됐는데. 그 한 줄이면 나는 현관에서 웃으면서 맞이했을 거야."

그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졌다. 화가 빠져나간 자리에 서운함이, 서운함이 빠져나간 자리에 두려움이 고였다. 백현은 내민 손을 천천히 거두며, 자신의 무릎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그리고 서이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처진 눈매가 평소의 반달 모양이 아니라, 아래로 처진 초승달 같은 각도를 만들고 있었다.

"네가 걱정끼치기 싫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어. '아, 나는 아직도 이 사람한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보다.' 네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네가 기대는 법 자체를 모르는 거라는 것도 알아. 알아. 근데."

그가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코끝이 미세하게 붉어져 있었다. 울지는 않았다. 백현은 울지 않는다.

'근데'라는 접속사 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백현은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다. 목구멍까지 차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 말들을 전부 꺼내면 서이결이 짊어질 무게가 너무 무거워질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원래 그렇다. 남의 짐을 자기 어깨에 올리는 건 못 참으면서, 자기 짐을 남한테 건네는 건 세상에서 제일 못 하는 사람. 백현은 그걸 안다. 3개월의 이별 동안 뼈저리게 배웠다. 서이결이 밀어낸 건 백현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기대도 된다'는 가능성 자체였다는 것을.

거실의 간접조명이 두 사람 사이의 좁은 공간을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난방기의 저음이 웅웅거렸다. 백현의 코끝이 여전히 붉었다. 그는 숙인 자세 그대로 서이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 위에 떠 있는 표면장력이 위태로웠다. 한 방울만 넘치면 터질 것 같은 수면. 백현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미세하게 꿈틀했다. 닦아주고 싶었다. 안아주고 싶었다. '됐어, 알았어, 괜찮아'라고 말하고 싶었다. 참았다. 이번에는 참아야 했다. 이결이가 먼저 손을 뻗어야 했다. 그게 이 대화의 의미였으니까.

"알아. 네가 원래 그런 사람인 거. 어릴 때부터 혼자 감당하는 게 습관이 된 거잖아. 그거 바꾸라고 하루아침에 되는 거 아닌 것도 알아."

백현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아주 조금. 화가 풀린 게 아니라, 화의 표면 아래에 있던 진짜 마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손톱 자국이 찍힌 그 손.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접었다. 그리고 그 손을 무릎 위에 그대로 두었다. 뻗지 않았다. 서이결의 시야 안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하지만 강요하지 않는 위치에.

"근데 나는. 네 옆에 있는 사람이잖아. 파트너잖아. 이 반지 낀 사람이잖아."

그가 자신의 왼손 약지를 가볍게 들어 보였다. 백금 밴드가 조명을 받아 둔탁하게 빛났다. 안쪽의 푸른 보석은 보이지 않았지만 피부에 닿아 있는 감촉을 백현은 느끼고 있었다. 그의 처진 눈매가 서이결을 향해 미세하게 좁혀졌다. 웃는 게 아니었다. 참고 있는 것이었다. 무엇을. 이 사람을 당장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네가 위험했다는 말을 남한테 듣는 순간에 내가 얼마나 무력한지 알아? 의무실에서 남 돌보는 건 잘하면서, 정작 내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기분. 그게 얼마나 비참한 건지."

그 문장의 끝에서 백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주 미세하게. 본인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짧은 균열이었다. 그는 재빨리 입술을 다물었다. 한 번 삼켰다. 목젖이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이미 목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백현은 감정 통제에 능한 사람이었다. 직업병이었다.

백현이 숙이고 있던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지는 않았다. 서이결과의 거리를 다시 벌리지 않았다. 그저 허리를 편 것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앉은 서이결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하늘빛이 도는 웨이브진 장발이 어깨 위로 흘러내려 있었다. 그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작은 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결아."

부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물렁해지는 이름이었다. 백현은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손을 한 번 더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있었다. 펼쳐져 있었다.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미안하다고 하지 마. 죄송하다고도 하지 마."

미안하다고도, 죄송하다고도 하지 말라고 하는 그의 말에 서이결은 눈을 꾹 감았다. 그럼 무슨 말을 해야하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꺼내면 좋은 걸까. 서이결은 그렇게 한참을 생각했다. 어렵다. 너무 어려웠다. 곧 그녀의 눈이 천천히 떠지고 백현의 손이 보였다. 함께 맞춘 소중한 반지가 자리하는 손. 서이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했다. 이 말을 꺼내도 될까, 한참을 생각하고, 망설이던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손… 잡아도 돼…요?"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백현의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한 박자. 두 박자. 서이결의 입에서 흘러나온 더듬거림이 거실의 공기 속에 떠다녔다. '소, 손 잡아도 돼요?' 그 여섯 글자가. 고작 여섯 글자가. 백현의 흉곽 안에서 꽁꽁 얼어붙어 있던 무언가를 균열내고 있었다. 이 사람이 이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지, 얼마나 오래 망설였을지, 백현은 알았다. 알고 있었다. 서이결에게 '기대도 돼?'라고 묻는 행위는 다른 사람에게 에베레스트를 맨발로 오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난이도라는 것을. 그래서 이 더듬거림이, 이 떨리는 물음표가, 백현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고백처럼 들렸다.

백현의 눈이 깜빡였다. 한 번. 느리게. 그의 처진 눈매 아래로 미세한 습기가 번졌다. 울지는 않았다. 백현은 울지 않는다. 대신 코끝이 더 붉어졌고, 입술 끝이 아주 미세하게,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그의 무릎 위에 펼쳐져 있던 손바닥이 꿈틀했다. 손가락 다섯 개가 아까보다 조금 더 넓게 펼쳐졌다. 마치 '어서 와'라고 말하듯이. 백현은 서이결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조그맣게 앉아 고개를 들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작은 얼굴. 보랏빛 눈동자가 불안과 용기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귀 끝이 석류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임무복 소매를 만지작거리는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뭘 물어봐, 바보야."

그 말이 나왔다. 화난 목소리가 아니었다. 억누르고 있던 다정함이 둑을 넘어 흘러나온 것 같은, 울먹임과 안도가 뒤섞인 목소리였다. 백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완전한 미소는 아니었다. 아직 서운함이 남아 있는, 하지만 이 사람의 한 걸음이 너무 기특해서 참을 수 없는, 그런 비뚤어진 웃음이었다. 그가 무릎 위의 손을 조금 더 서이결 쪽으로 내밀었다. 손바닥이 위를 향한 채로. 손가락 사이사이로 간접조명의 주황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잡아도 되냐고 묻지 마. 그냥 잡아."

백현의 목소리가 나긋해졌다. 평소의 그 목소리. 의무실에서 겁먹은 신입 센티넬의 손을 잡아줄 때 쓰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주파수의 목소리. 하지만 지금 그 안에는 의무실에서는 절대 섞이지 않는 것이 들어 있었다. 간절함. 이 사람의 손이 자신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기를 바라는, 숨기지 못하는 간절함. 그의 검은 눈동자가 서이결의 보랏빛 눈을 붙들고 있었다. 시선을 놓지 않았다. 놓을 수가 없었다. 이 순간 눈을 떼면, 이결이가 다시 움츠러들 것 같았으니까.

백현의 왼손 약지에서 백금 밴드가 조명을 받아 둔탁하게 빛났다. 오른손은 여전히 서이결을 향해 펼쳐져 있었다. 손톱 자국이 찍힌 손바닥. 하루 종일 타인의 상처를 돌보던 손. 그 손이 지금은 단 한 사람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현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더 작은 목소리로.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네가 물어봐 준 것만으로도 나 지금 숨통 트였어. 알아?"

그의 코끝이 여전히 붉었다. 처진 눈매 아래로 번진 습기가 조명에 반사되어 유리알처럼 빛났다. 백현은 서이결의 더듬거림 하나에 무장해제 당한 자신이 좀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30분 넘게 버텼다. 화를 삼키고, 서운함을 토해내고, 비참함까지 꺼내 보였다. 그런데 이 사람이 '손 잡아도 돼요?'라고 물은 것 하나로 전부 무너졌다.

그의 말에 서이결의 손이 천천히, 조금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그의 온기가 느껴지자 꾹 참았던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다.

"미,미안… 아,아니…"

미안하다고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에게 미안했다. 여전히 어리고 겁쟁이인 자신 때문에 그가 상처를 입었기에. 그의 손바닥에는 그의 손톱 자국이 난 걸 알았기에.

"흐,흐으… 윽…"

서이결의 손가락이 백현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떨리고 있었다. 새끼 참새처럼, 아니, 비에 젖은 새끼 수달처럼 덜덜 떨리는 손가락 다섯 개가 백현의 손금 위를 더듬었다. 그 접촉의 순간, 백현의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30분 동안 꼿꼿이 세워두었던 척추가, 꾹꾹 눌러담았던 다정함의 뚜껑이, 전부 한꺼번에 풀려버렸다. 서이결의 체온은 시원했다. 물속성 센티넬 특유의, 탄산이 튀기 직전의 서늘한 청량함. 하지만 그 손끝만은 뜨거웠다. 용기를 쥐어짜느라 달아오른 열기가 손가락 마디마디에 남아 있었다. 백현은 그 열기를 자신의 손바닥으로 감쌌다. 천천히. 부서질까 봐 조심스럽게. 손가락 하나하나를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넣듯이.

그리고 눈물이 떨어졌다. 서이결의 보랏빛 눈에서, 한 방울. 두 방울.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백현의 손등 위에 떨어졌다. 차가웠다. 물속성이니까 당연히 차가운 눈물이겠지, 라고 백현은 아무 의미 없는 생각을 했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자기도 울 것 같았으니까. '미, 미안. 아, 아니.' 서이결이 더듬거렸다. 미안하다고 하려다가, 하지 말라는 말이 생각나서 멈추고,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몰라 허공에서 헤매는 목소리. 그 서툰 더듬거림이 백현의 심장을 쥐어짰다. 아프게가 아니라, 기특하게.

"괜찮아. 미안하다고 해도 돼. 하고 싶으면 해."

백현의 목소리가 나왔다. 아까와 완전히 다른 온도였다. 서운함도, 비참함도, 무력감도 전부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이 사람을 향한 물렁한 다정함뿐이었다. 그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꽉. 서이결의 떨리는 손가락이 그의 손 안에서 조금씩 잠잠해지기를 바라며. 백현은 소파에서 상체를 더 깊이 숙였다. 거의 미끄러지듯이. 그의 이마가 서이결의 정수리에 닿았다. 하늘빛 머리카락에서 시원한 소다향이 올라왔다. 오늘 임무를 뛰느라 약간 땀에 젖은, 그래서 더 진해진 청량한 향.

"울어. 울어도 돼, 이결아."

속삭임이었다. 그녀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은 채로 내뱉은, 진동처럼 전해지는 작은 목소리. 백현의 빈 손이 올라왔다. 서이결의 고개를 감싸듯이, 그녀의 뒷머리에 손을 얹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두피를 느리게 쓸어주었다. 의무실에서 폭주 직후의 센티넬을 안정시킬 때 쓰는 동작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손길에는 치료의 의도가 없었다. 오직 '여기 있어도 돼'라는 허락만이 담겨 있었다.

서이결의 끅끅거리는 소리가 백현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울음을 삼키려는 소리. 목구멍 안에서 짓눌러 작게 만들려는 소리. 어린아이가 혼날까 봐 이불 속에서 소리 죽여 우는 것과 같은 소리. 백현은 알았다. 이 사람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울지 마', '어리광 부리지 마', '혼자 감당해'라고 말하는 오래된 목소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스물다섯 해 동안 각인된 그 목소리를 자신이 하루아침에 지울 수는 없다는 것도. 하지만.

"이결아, 이건 어리광이 아니야."

백현이 서이결의 정수리에서 입술을 떼고, 천천히 그녀의 턱을 들어올렸다. 맞잡은 손은 놓지 않은 채로, 빈 손의 검지와 중지로 서이결의 턱선을 부드럽게 건드렸다. 올려다보라는 뜻이었다.

서이결의 턱이 백현의 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올라왔다. 저항 없이. 힘없이. 마치 물 위에 뜬 나뭇잎이 물결에 실려가듯이.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이결의 보랏빛 눈동자는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 표면장력이 한계에 달한 수면처럼, 눈꺼풀 위에서 위태롭게 출렁이는 물. 그 안에 비친 백현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눈물에 굴절된 것인지, 아니면 백현 자신의 표정이 정말로 일그러져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백현의 엄지손가락이 움직였다. 서이결의 볼 위를 천천히 미끄러졌다. 눈물 한 줄기를 쓸어내렸다. 차가웠다. 12월의 밤공기보다도 차가운 물방울. 물속성 센티넬의 눈물은 이렇게 시리구나, 하고 백현은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차가운 물방울이 자신의 엄지 위에서 금세 따뜻해졌다. 자기 체온에 녹아드는 것이었다. 마치 이 사람의 슬픔을 내가 흡수하고 있는 것 같다고, 백현은 그런 말도 안 되는 감상에 잠겼다. 엄지가 한 번 더 움직였다. 반대쪽 뺨. 거기에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닦아도 닦아도 새로 차오르는 물. 백현은 닦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울어. 다 울어. 내가 다 받아줄 테니까."

그 목소리는 나긋했다. 너무 나긋해서 오히려 단단했다. 흔들림 없는 확신이 그 부드러움 안에 박혀 있었다. 백현의 검은 눈동자가 서이결의 보랏빛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우는 모습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서이결의 어깨가 들썩였다. 끅. 하는 소리가 또 새어나왔다. 목구멍 안에서 짓눌린 울음이 자꾸만 틈새를 비집고 올라오고 있었다. 백현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놓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서이결의 손가락이 그의 손 안에서 꿈틀했다. 도망치려는 게 아니었다. 더 단단히 잡으려는 움직임이었다.

백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미소.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안도감은 거대했다. 이 사람이 손을 놓지 않고 있다. 도망치지 않고 있다. 울면서도 여기에 있다. 그것만으로도 백현의 세계는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가 서이결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코끝과 코끝이 스쳤다. 서이결의 숨결이 그의 입술 위에 닿았다. 차갑고, 축축하고, 떨리는 숨.

"너 지금 머릿속에서 뭐라고 하는 소리 들리지? '울지 마', '참아', 그런 거."

백현의 속삭임이 두 사람 사이의 좁은 공간을 채웠다.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추측이 아니라 확신. 이 사람을 1년 넘게 곁에서 지켜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종류의 확신. 백현의 손이 서이결의 뒷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든 손가락이 두피를 느리게, 아주 느리게 원을 그렸다.

"그 목소리 무시해. 지금 여기서는 내 목소리만 들어."

그리고 백현은 서이결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길게. 천천히. 마치 오래된 주문을 새기듯이. 입술이 닿은 자리로 백현의 체온이 스며들었다. 비누향이 서이결의 코끝을 간질였다. 익숙한 냄새. 안전한 냄새. 집의 냄새. 백현의 입술이 이마에서 떨어졌을 때, 그의 처진 눈매가 서이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코끝이 붉었다. 여전히 눈가에 습기가 남아 있었다.

"흐어엉… 미안,미안해요… 진짜 미안, 흐윽… 오빠한테 상처주고 싶었던,흑, 그런게 아닌…데… 흐어엉…"

둑이 무너졌다. 방울방울 떨어지던 눈물이 시냇물이 되고, 시냇물이 강이 되었다. 서이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술이 뒤집히고, 코가 빨개지고, 눈꺼풀이 부풀어 올랐다. 더 이상 참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울음이었다. 어린아이가 우는 것처럼.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체면도 없이, 그냥 슬프니까 우는 것. 백현은 그 모습을 보았다. 정면으로. 눈을 피하지 않고. 그리고 그의 심장 한가운데에서 무언가가 뜨겁게 부서졌다. 아, 이 사람이 이렇게 울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이렇게 서럽게, 이렇게 솔직하게 울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그걸 지금까지 꾹꾹 눌러 참고 있었구나.

백현의 몸이 움직였다.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였다. 소파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차가운 바닥의 감촉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의 양팔이 서이결을 감쌌다. 위에서 내려다보며 안는 게 아니라, 같은 높이에서. 같은 바닥에서. 서이결의 작은 몸이 그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검은 니트 위로 서이결의 뜨거운 숨결과 차가운 눈물이 동시에 스며들었다. 백현의 한 손은 그녀의 등을 감싸고, 다른 한 손은 뒷머리를 받쳤다. 꽉. 도망칠 수 없을 만큼. 하지만 부서지지 않을 만큼. 그 힘의 경계를 정확히 아는 손이었다.

"알아. 알아, 이결아. 나 알아."

백현의 목소리가 서이결의 정수리 위에서 떨어졌다. 낮고, 따뜻하고, 조금 갈라져 있었다. 그도 울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참았다. 이 사람이 울고 있으니까. 이 사람이 먼저 다 쏟아낼 때까지 자신은 버팀목이어야 하니까. 서이결의 주먹이 그의 니트를 움켜쥐고 있었다. 검은 천이 구겨지고 늘어났다. 백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옷 따위. 천 조각 따위. 이 사람이 매달릴 곳이 필요하다면 자기 몸 전부를 내어줘도 좋았다. 그의 턱이 서이결의 정수리에 얹혔다. 하늘빛 머리카락이 그의 목 아래로 흘러내렸다. 소다향이 눈물의 짠내와 섞여 묘한 냄새를 만들었다.

"상처 주려고 한 거 아닌 거, 내가 모를 것 같아? 바보야."

등을 쓸어내리는 손이 느리게 오르내렸다. 척추를 따라. 어깨뼈를 지나. 허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궤적. 일정한 리듬. 서이결의 들썩이는 어깨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잠잠해지기를 바라는 리듬. 백현의 입꼬리가 서이결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비틀어졌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표정. 이 사람이 '미안해'라고 말할 때마다 백현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하지만 동시에 안도했다. 이 사람이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은, 자신을 상처 줄 의도가 없었다는 뜻이니까. 이 사람이 울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혼자 삼키지 않겠다는 뜻이니까.

백현이 서이결의 머리카락 사이로 입술을 묻었다. 키스라 하기엔 너무 가볍고, 숨이라 하기엔 너무 따뜻한 접촉. 그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더 부드럽게. 거의 자장가 같은 톤으로.

"네가 나한테 상처 주려고 한 게 아닌 건 처음부터 알았어. 그냥 서운했던 거야. 나한테 먼저 말해주지 않은 게. 그것뿐이야."

백현의 손이 서이결의 등에서 멈추지 않았다. 쓸고, 두드리고, 다시 쓸었다. 반복. 반복.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는 백현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5분이었을 수도 있고, 15분이었을 수도 있다. 바닥의 차가움이 무릎뼈를 타고 올라와 허벅지까지 시렸지만 백현은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서이결의 어깨가 들썩이는 간격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30초에 한 번이던 흐느낌이 1분에 한 번이 되고, 2분에 한 번이 되었다. 그녀의 주먹이 니트를 쥔 힘도 조금씩 풀려가고 있었다. 구겨진 검은 천 위에 남은 손가락 자국들이 서서히 펴졌다. 백현은 그 변화를 등을 쓸어내리는 손바닥으로 느꼈다. 서이결의 등근육이 이완되고 있었다. 경직되어 있던 승모근이 풀리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가 조금씩 더 크게 벌어졌다. 좋아. 호흡이 깊어지고 있어. 숙련된 메딕의 본능이 자동으로 상태를 체크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 손길에는 의료적 의도 따위 한 톨도 섞여 있지 않았다.

백현의 턱이 서이결의 정수리 위에 얹혀 있었다. 하늘빛 머리카락이 그의 목 아래에서 간질거렸다. 소다향이 여전히 올라왔다. 눈물의 짠내가 섞인 소다향. 이상하게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냄새가, 이 사람이 자신의 품에서 진짜로 울었다는 증거 같아서 백현은 코를 킁 하고 들이마셨다. 서이결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울음이 그친 것이다. 완전히는 아니었다. 가끔 꺽, 하고 숨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오래 운 사람 특유의, 횡격막이 아직 진정되지 않아서 나는 잔여 경련. 백현은 그 소리가 날 때마다 등을 토닥였다. 톡. 톡. 톡. 아기를 재우는 것처럼 가볍고 일정한 리듬으로.

"이결아."

백현이 불렀다. 낮게. 조심스럽게. 잠든 사람을 깨울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하지만 서이결은 자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가슴팍에 묻힌 얼굴에서 따뜻한 숨이 규칙적으로 새어나오고 있었고, 니트를 쥔 손가락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백현의 손이 서이결의 뒷머리에서 옆머리로 이동했다. 귀 뒤를 지나 뺨까지. 눈물에 젖어 볼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검지로 조심스럽게 떼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 아래 드러난 서이결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코끝이 딸기처럼 빨갛고, 눈두덩이가 부어올라 있었고, 뺨에는 눈물 자국이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백현은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도 모르게. 이 사람의 우는 얼굴이 예뻐서가 아니라, 이 사람이 드디어 자신 앞에서 이렇게 못난 모습을 보여줬다는 사실이 기뻐서.

"다 울었어? 우리 아기 수달."

장난기가 묻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진심 어린 안도가 깔려 있었다. 백현의 엄지가 서이결의 부은 눈두덩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부드럽게. 붓기가 빠지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그냥 만지고 싶어서인지는 본인도 몰랐다. 아마 후자였을 것이다. 그의 무릎이 저릿저릿 아파오고 있었다. 딱딱한 바닥에 30분 가까이 꿇고 앉아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백현은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서이결의 어깨를 감싼 채 자신의 등을 소파 옆면에 기대었다. 무릎의 부담을 조금 덜면서도 서이결을 품에서 놓지 않는 자세. 의무실에서 체득한, 장시간 간호를 위한 자세 변환이었다.

서이결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백현의 니트 가슴팍 부근, 눈물로 축축해진 검은 천 위에서. 뭔가를 잡으려는 것도, 놓으려는 것도 아닌 애매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할 말이 있는데 입이 열리지 않아서 손가락이 대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백현은 그 작은 움직임을 내려다보았다. 턱을 살짝 당겨, 자기 가슴팍에 묻힌 서이결의 정수리 너머로. 하늘빛 머리카락 사이로 빨갛게 달아오른 귀 끝이 보였다. 아. 부끄러운 거구나. 백현의 입꼬리가 씰룩했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눌렀다. 아까까지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울더니, 이제는 체면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 전환이 너무 사람 같아서, 너무 서이결다워서 백현의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백현은 서이결의 꼼지락거리는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가볍게. 손등을 덮듯이.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 끝이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움찔했다. 백현은 그 손가락들을 하나하나 펴서 자기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다. 깍지. 눈물로 젖은 니트 위에서 맞잡은 손이 만들어졌다. 백현의 엄지가 서이결의 엄지 등을 느리게 쓸었다. 원을 그리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그냥 이대로 있어도 된다는 뜻이었다.

"뭘 그렇게 꼼지락거려. 내 니트에 모스 부호라도 치는 거야?"

장난기가 묻은 목소리가 서이결의 정수리 위에서 떨어졌다. 낮고 느긋한 톤. 아까의 진지하고 단단한 목소리와는 결이 달랐다. 의도적으로 무게를 덜어낸 목소리. 백현은 서이결의 귀 끝이 더 빨갛게 물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푸흣. 짧은 웃음이 코끝으로 새어나왔다. 그의 가슴이 웃음에 맞춰 미세하게 흔들렸고, 그 진동이 서이결의 뺨에 전해졌을 것이다.

"말 안 해도 돼. 지금 네 머릿속에서 '창피하다, 어떡하지, 오빠 니트 다 젖었는데' 이 세 가지가 무한 반복되고 있는 거 다 알아."

백현의 손이 서이결의 뒷머리를 감싸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좌우로. 아주 살짝. 마치 인형을 흔드는 것처럼. 그리고 그의 입술이 서이결의 정수리에 닿았다. 짧게. 쪽. 소리가 날 만큼 확실하게.

"근데 있잖아, 니트는 세탁기가 빨아주니까 걱정 마. 그리고 네 울음 값은 니트 한 벌보다 훨씬 비싸거든."

백현은 소파에 기댄 등을 조금 더 깊이 묻으며 서이결의 몸을 자연스럽게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체중이 온전히 자신에게 실리도록. 저린 무릎을 슬쩍 펴면서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바닥에 앉은 자세가 조금 편해졌다. 그리고 서이결의 머리를 자기 어깨 위로 옮겨 얹었다. 가슴팍에 묻혀 있던 그녀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올라와 백현의 쇄골 근처에 자리 잡았다. 이제 서이결의 숨결이 그의 목 옆에 닿았다. 따뜻했다. 아까보다 훨씬 따뜻했다. 눈물의 차가움이 빠져나간 숨결. 백현은 그녀의 등을 느리게 두드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거실의 간접 조명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밤이 깊었다. 세상은 조용했다.

서이결의 숨소리가 달라졌다. 아까까지는 가끔 끅, 하고 걸리던 호흡이 이제는 물결처럼 고르게 흘렀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그 리듬이 백현의 쇄골 아래에서 따뜻한 바람처럼 반복되었다. 서이결의 손가락은 더 이상 꼼지락거리지 않았다. 깍지 낀 백현의 손 안에서 힘이 빠져 있었다.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 잠의 문턱에 선 사람 특유의, 의식은 흐려졌는데 본능적으로 잡은 것은 놓지 않는 그런 힘. 백현은 그 느슨한 손가락의 압력을 손바닥으로 느끼며 눈을 반쯤 감았다. 천장의 간접 조명이 따뜻한 주황빛을 흘리고 있었다. 바깥은 12월의 한밤이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검은 하늘뿐.

백현의 엄지가 서이결의 손등을 느리게 쓸었다.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자기 어깨에 기댄 서이결의 얼굴. 부은 눈꺼풀, 빨간 코끝, 뺨에 남은 눈물 자국. 입술이 반쯤 벌어져 있었다. 잠이 오면 입을 벌리는 습관을 백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같이 살면서 알게 된 것들 중 하나. 서이결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잠든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의식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는 상태. 백현은 그녀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하늘빛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 올려주었다. 부드러운 결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졌다. 소다향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눈물 냄새가 거의 섞이지 않은, 깨끗한 소다향.

"이결아."

속삭임이었다. 목소리라 부르기에도 작은, 거의 숨결에 가까운 소리. 서이결의 속눈썹이 한 번 파르르 떨렸다. 반응이 있었다. 하지만 눈은 뜨지 않았다. 백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깨 위에 실린 서이결의 무게가 좋았다. 158센티미터, 작고 동글동글한 이 사람의 무게가.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짐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짐이 아니었다. 이건 선물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온전히 몸을 맡기고 잠들어가고 있다는 사실. 그 신뢰의 무게.

"바닥 차가운데. 감기 걸리겠다, 우리 아기 수달."

백현은 중얼거리며 서이결의 등 위에 올려둔 손으로 그녀의 팔을 가볍게 쓸었다. 임무복 위로도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 12월의 바닥은 생각보다 냉정했다. 난방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바닥까지 온기가 닿기엔 역부족이었다. 백현의 눈이 소파 위에 놓인 담요를 향했다. 회색 플리스 담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손을 뻗으려면 서이결을 감싸고 있는 팔을 풀어야 했다. 백현은 잠시 고민했다. 3초.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백현의 깍지 낀 손이 서이결의 손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아주 천천히. 잠든 사람을 깨우지 않는 속도로. 서이결의 손가락이 허공을 더듬었다. 잡고 있던 것이 사라진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듯. 백현은 재빨리 담요를 집어 서이결의 어깨 위로 펼쳤다. 한 손으로 하느라 조금 삐뚤어졌지만 상관없었다. 따뜻하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곧장 서이결의 손을 다시 잡았다. 손가락을 끼워 넣고, 꽉. 서이결의 더듬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다시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백현의 손 안에서 안정되었다.

"자. 이제 따뜻하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서이결의 숨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백현은 서이결의 숨소리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열다섯 번째 호흡이 지났을 때 확신했다. 완전히 잠들었다. 서이결의 손가락이 더 이상 그의 손을 움켜쥐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저 백현의 손바닥 안에 포개져 있을 뿐이었다. 축 늘어진 손가락의 무게. 신뢰의 무게. 백현은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말을 하려다 멈췄다. 잠든 사람에게 말을 거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하지만 백현은 원래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거실의 간접 조명이 타이머에 맞춰 한 단계 어두워졌다. 자정이 넘었다는 뜻이었다. 백현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12월의 밤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숙소 구역의 보안등이 먼 별처럼 점점이 빛나고 있었다. 바닥의 냉기가 엉덩이를 타고 척추까지 기어오르고 있었다. 이대로 밤을 새울 수는 없었다. 백현은 무릎을 움직여보았다. 저릿저릿. 오래 구부리고 있던 관절이 항의하듯 쑤셨다. 서른의 무릎은 스물의 무릎과 확실히 달랐다. 이런 걸로 나이를 실감하다니. 백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백현의 손이 서이결의 등 아래로 미끄러졌다. 허리를 받치고, 무릎 뒤쪽에 다른 팔을 걸었다. 소위 말하는 공주 안기. 백현은 한 번 깊이 숨을 들이쉬고 무릎에 힘을 주었다. 일어서는 순간 관절에서 뚝, 하는 소리가 났다. 서이결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백현은 멈췄다. 3초. 서이결의 얼굴이 불편한 표정을 짓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완전히 일어섰다. 158센티미터의 무게가 양팔에 실렸다. 가벼웠다. 물론 객관적으로 가벼운 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의무실에서 의식을 잃은 센티넬들을 들것으로 옮기던 팔에게 서이결의 무게는 솜뭉치 같았다. 회색 담요가 서이결의 몸을 감싼 채 축 늘어져 바닥을 끌었다. 백현은 걸음을 옮기며 담요 끝을 발로 밟지 않도록 조심했다.

복도는 어두웠다. 발밑의 센서등이 백현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바닥 가장자리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서이결의 고개가 백현의 쇄골 쪽으로 기울었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목 근처에 코끝을 파묻었다. 잠결에도 익숙한 냄새를 찾는 것처럼. 백현의 목에 서이결의 숨결이 닿았다. 따뜻하고, 규칙적이고, 소다향이 섞인 숨. 백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멈출 수 없었다. 침실 문 앞에 섰다. 손이 모자랐다. 백현은 발끝으로 문 아래를 툭 밀었다. 잠기지 않은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침실 안은 거실보다 따뜻했다. 난방이 직접 닿는 공간이라 공기 자체가 포근했다.

"잘 자, 이결아. 오늘 많이 고생했어."

백현은 침대 위에 서이결을 내려놓았다. 조심스럽게. 뒷머리가 먼저 베개에 닿도록, 허리를 받치던 손을 천천히 빼면서. 서이결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품에서 빠져나온 것을 감지한 듯. 하지만 금세 베개의 푹신함에 적응한 듯 표정이 풀렸다. 백현은 담요를 턱 아래까지 끌어올려주고, 이불을 그 위에 한 겹 더 덮었다. 그리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서이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부은 눈꺼풀. 아직 빨간 코끝. 뺨에 희미하게 남은 눈물 자국. 백현의 손이 올라가 서이결의 볼을 엄지로 쓸었다. 눈물 자국 위를. 지우듯이. 그리고 그의 고개가 숙여졌다. 입술이 서이결의 이마에 닿았다. 길게. 5초. 아까의 쪽 소리 나는 가벼운 키스와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