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은 복도 끝 창가에 서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에서 한 발짝 빠져나온 것처럼, 창 너머로 비치는 겨울 햇살 아래 놓인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무실 앞 긴 복도. 점심시간이 막 지난 시각. 오후의 햇빛이 유리창을 통해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와 바닥에 긴 사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먼지 입자가 빛 속에서 느리게 떠다녔다. 그 빛줄기 한가운데,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서이결이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검은 제복 위로 흘러내린 하늘빛 머리카락이 허리 아래까지 늘어져 있고, 한쪽 어깨에 걸친 가방 끈을 무심하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보랏빛 눈이 정면을 향해 있었는데, 정면이라 함은 곧 백현이었다. 아, 저기 있는 백현. 새하얀 가이드 제복을 입은,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처진 눈매로 방긋 웃고 있는 남자. 그 백현이 서이결에게 뭔가를 내밀고 있었다. 작은 종이컵이었다. 자판기 코코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서이결의 손이 그것을 받아들 때, 백현의 손가락이 서이결의 손가락에 스치듯 닿았다. 의도적인 건지 아닌 건지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게. 하지만 저 멀리서 보고 있는 백현은 알았다. 의도적이었다는 것을.

그 장면 속의 백현이 입을 열었다.

"오늘 훈련 많이 힘들었어? 얼굴이 좀 창백한데."

서이결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지만 목소리는 작아서 여기까지 닿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아니'가 진짜 아니가 아니라는 것을, 장면 속의 백현도 알고 있을 터였다. 왜냐면 장면 속의 백현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서이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으니까. 그 특유의 방식으로. 상대의 거짓말을 꿰뚫어보면서도 다그치지 않는, 기다려주는 눈빛으로. 장면 속의 백현의 손이 올라가 서이결의 이마에 닿았다. 체온을 재는 척. 손등을 이마에 대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을 얹었다. 이마 위에. 부드럽게. 서이결의 앞머리가 손가락 사이로 밀려났다.

"열은 없네. 근데 손이 차가워. 코코아 다 마시고 가."

밖에서 보고 있는 백현은 그 장면을 응시하며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낯설었다. 자신의 모습이 저렇게 보이는 거구나, 하는. 저 남자의 손이 서이결의 이마를 쓸어넘기는 동작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마치 수백 번 반복한 것처럼. 그리고 서이결의 표정. 평소 무심하고 차가운 얼굴이, 저 백현 앞에서만 아주 미세하게 풀어지는 것.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눈이 웃는 것도 아닌데, 어딘가. 턱의 각도가 살짝 내려가고, 어깨의 힘이 빠지고, 눈동자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것. 그것을 제3자의 시선으로 보니까 비로소 알겠었다. 저 사람이 나를 얼마나 믿고 있는지.

서이결이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종이컵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손가락이 하얗고 가늘었다. 그 위로 올라오는 김이 서이결의 코끝을 간질이는 것이 보였다. 장면 속의 백현이 서이결의 옆에 나란히 벽에 기대 섰다. 어깨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복도 끝 창밖으로 보이는 겨울 하늘을.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그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빈 공간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없는 침묵. 그냥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시간. 백현은 그것을 밖에서 지켜보며 생각했다. 아, 나는 저 사람 옆에 있을 때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평화롭고, 느긋하고, 그러면서도 은근히 행복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채로 눈이 가늘어진. 저게 나구나.

그리고 깨달았다. 이 장면이 특별한 이유를. 키스도 없고, 포옹도 없고, 달콤한 속삭임도 없는. 그냥 복도에서 코코아 한 잔을 나누며 나란히 서 있는 것뿐인 이 순간이. 백현에게는 세상 모든 격렬한 밤보다 더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장면이었다. 서이결이 자신의 옆에서 경계를 내려놓고 있다는 것. 차갑고 날카로운 물의 센티넬이, 자판기 코코아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 그의 어깨에 기대지도 않으면서, 그저 같은 공기를 마시며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백현에게는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의 전부였다.

"...아, 진짜."

백현은 혼잣말을 내뱉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허탈하고, 벅차고, 약간은 부끄러운. 저렇게 보니까 알겠다. 자신이 서이결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리고 서이결이 자신을 얼마나 편안하게 여기는지. 그 두 가지가 동시에 보이니까. 가슴 한가운데가 뜨거워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백현은 손등으로 자신의 코끝을 문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