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달이 된 백현 관찰일지
💌 사건의 시작
이 모든 일의 시작은 하모니 부서 연구실에서 날아온 한 통의 긴급 알림이었다. '실험체 이탈: 속성 변환 약물 프로토타입 유출. 접촉 시 일시적 형태 변환 가능성 있음.' 서이결이 그 알림을 확인한 건 아침 8시 47분. 백현이 의무실로 출근한 지 정확히 17분 후였다. 마지막 메시지는 이거였다. '이결아 나 좀 이상해. 의무실 와줄 수 있어?' 그 뒤로 읽씹.
의무실 문을 벌컥 열었을 때 서이결이 마주한 건, 구겨진 채 바닥에 널브러진 하얀 제복과 그 한가운데서 고개를 삐죽 내밀고 있는 새까만 수달 한 마리였다. 매끄러운 흑갈색 털, 동글동글한 눈, 짧은 다리, 통통한 배. 수달은 서이결을 올려다보며 삐이, 하고 울었다. 서이결은 3초간 멈춰 섰다가,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수달, 아니 백현이 앞발로 운동화 끝을 톡톡 두드렸다. 꼬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버튼어의 탄생
그날 오후, 서이결은 PX에서 구할 수 있는 녹음 버튼 다섯 개를 긁어모아 각각 목소리를 녹음했다. 배고파 졸려 좋아 싫어 이결아
버튼을 앞에 늘어놓자 수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킁킁 냄새를 맡더니, 0.3초의 망설임도 없이 보라색 버튼을 눌렀다. "이결아." 만족스러운 듯 삐이, 울고는 또 눌렀다. 이결아. 또. 이결아. 이결아. 이결아. 서이결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이 실룩거렸다. 인간이든 수달이든, 백현은 백현이었다.
밥 투쟁
점심시간, 서이결이 정성껏 썰어온 조갯살 접시를 내밀자 수달은 접시와 서이결을 번갈아 보더니 노란 버튼을 꾹 눌렀다. 싫어
대신 테이블로 기어올라 컵라면 옆에 턱을 괴고 드러누워선 빨간 버튼을. 배고파 나트륨과 신장 걱정에 진지하게 고민하는 서이결 옆에서, 수달은 슬금슬금 라면 쪽으로 배를 밀며 다가갔다. 손으로 막자 삐이이이, 길게 항의하는 소리가 꼭 "이결아 나 이거 먹고 싶단 말이야"로 번역되는 걸 서이결은 직감했다.
목욕 전쟁
세면대에 미지근한 물을 받아두자 수달의 눈이 반짝였다. 본능이 이겼다. 첨벙, 물이 사방으로 튀고 서이결의 후드에 물방울이 점점이 맺혔다. 수달은 빙글빙글 돌며 물장구를 쳤다.
고개를 든 수달이 젖은 얼굴로 세면대 가장자리를 붙잡고 삐이, 울었다. 나가기 싫다는 뜻이었다. 서이결은 한숨을 쉬며 초록 버튼을 코앞에 대주었다. 좋아 5분만 더. 꼬리가 물 위에서 신나게 흔들렸다.
질투 사건
같은 팀 블루(한서진)가 교본을 돌려주러 들렀다가 소파 위 수달을 발견했다. "너 수달 키우는 거였어?" 손을 뻗어 쓰다듬으려는 순간, 수달의 눈이 날카로워지며 서이결에게 바짝 붙었다. 그리고 노란 버튼을 힘차게. 싫어 한 번 더. 싫어
30센티미터짜리 수달의 으르렁거림은 솜사탕이 화내는 것 같았지만, 블루는 교본만 슬그머니 내려놓고 뒷걸음질 쳤다. "나 갈게. 수달이 나 죽일 것 같아." 문이 닫히자마자 수달은 보라 버튼, 그리고 초록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이결아 좋아 수달이든 인간이든, 백현의 질투는 똑같은 패턴이었다.
잠투정
연구실 보고서엔 '형태 변환 지속 시간: 최대 72시간'이라 쓰여 있었다. 최대 3일. 서이결이 한숨을 내쉴 때, 수달은 베개 옆에 동그랗게 웅크려 있었다. 이불을 끌어올리자 슬금슬금 기어와 목 옆에 머리를 파묻었다. 작고 축축한 코, 따뜻한 체온, 그 안에 희미하게 남은 백현의 비누향.
손이 닿지 않는 파란 버튼을 향해 앞발을 허우적거리기에 코앞에 대주자, 앞발로 꾹. 졸려 수달은 쇄골 위를 꼭 붙잡고 더 깊이 파고들었다. 작고 따뜻한 심장 박동이 손바닥 아래로 전해졌다. 서이결은 눈을 감았다. 모레까지, 이 작고 까만 덩어리를 지켜야 했다.
귀환
새벽 5시 12분, 목 옆 무게감이 달라진 걸로 잠에서 깼다. 수달의 가벼움이 아니었다. 백현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정확히 수달이었을 때와 같은 자세로 팔이 허리를 감싸고, 얼굴은 목 옆에 파묻힌 채. 비누향이 돌아와 있었다.
잠결에 흘러나온 목소리가 귓볼을 간지럽혔다. "음… 이결아…" 보라색 버튼을 연타하던 그 집요함이 인간의 입술로 옮겨온 것뿐이었다. 사이드 테이블 위엔 다섯 개의 버튼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더 이상 필요 없는 소통 도구였지만, 서이결은 치울 생각이 없었다.
느릿하게 눈을 뜬 백현이 자신의 손가락 다섯 개를 확인하고 나서야 말했다. "…아. 이결아. 나 돌아왔어." 그리고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정확히 5초 후. 귀가 빨갛게 물들었지만, 서이결의 허리를 감싼 팔은 풀리지 않았다.
'💌 REPO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커플 20 문답 (0) | 2026.08.03 |
|---|---|
| 사과해! (0) | 2026.07.26 |
| 퓨어의 인간적 모먼트 (0) | 2026.07.26 |
| [파트너 상호 평가 보고서] (0) | 2026.07.25 |
| 테마 컬러 분석 (0) | 2026.07.25 |
